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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진휼청(賑恤廳)은 처음에는 구황청(救荒廳)이라 하였으며, 비변사에서 관장하였다. 고려시대 이래 궁핍한 자들을 진휼하기 위하여 의창(義倉)이 설치되었으며, 이를 관리하기 위한 기구로 삼사(三司)가 있었다. 의창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에도 존속하였으나, 1405년(태종 5)에 육조의 직무를 나누게 되면서 의창의 진제(賑濟) 업무를 호조에 속한 판적사(版籍司)가 담당하게 되었다.
진휼청은 항상적으로 설치된 기관은 아니었으므로, 설치와 혁파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하였다. 1511년(중종 6)과 1516년(중종 11) 진휼청을 설치하였으며, 이후에도 명종대를 비롯하여 진휼청이 수시로 설치되었다.
1626년(인조 4)에는 비변사에서 관할하던 진휼청이 선혜청에 이속되어 상평청과 합병되었다. 서울과 지방의 휼전(恤典)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흉년의 여부와 관련하여 진휼을 실시하게 되면 진휼청이라 하였고, 진휼이 끝나면 상평청으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다. 진휼청은 비변사에서 관리되었다. 1753년(영조 29)에 균역청에 합쳐졌지만, 각각의 청(廳)의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곡물의 사용도 여러 청들이 합쳐져 관리가 어려웠기 때문에, 1770년(영조 46)에 선혜청 제조 정홍순(鄭弘淳)이 상평창 곡식과 진휼청 곡식을 달리 회계하여야 하는 것이 불편함을 들어 하나로 합칠 것을 청하였고, 명칭이 상진곡(常賑穀)으로 바뀌었다. 약간의 변경을 거치며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폐지되기까지 370년 동안 존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