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1795년(정조 19) 정조가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관련하여 쓴 비용 중 남은 돈 20,000냥으로 설치한 환곡.
[내용]
정리곡의 설치 과정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실린 삼도팔도을묘정리곡절목(三都八道乙卯整理穀節目)에 잘 드러나고 있다. 정리곡은 정리소(整理所)에서 마련한 돈 103,000여 냥 중에서 정조가 수원에 행행(行幸)하여 각종 비용으로 쓴 것, 화성에 둔전(屯田)을 설치하는데 사용한 것, 제주도의 진휼로 사용한 것 외에 남은 20,000냥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8도(道)와 3도(都)에 나누어 주었으며, 이때 분배된 내용을 보면, 경기도에 2,000냥, 호서·호남·관서에 각각 3,200냥, 영남에 4,000냥, 화성(華城)·관동·해서·관북에 각각 1,000냥, 송도와 강화에 각각 200냥을 보내도록 하였다. 해당 도의 관찰사와 유수들은 읍의 크기에 따라 돈을 분배한 후 곡물로 만들어 읍의 명칭과 분급받은 곡물의 양을 보고하고, 이를 비변사 유사당상이 관리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
감사와 유수들은 정리곡을 해마다 환곡으로 나누어 주고, 모곡으로 거두어들여 회록(會錄)한 내용을 연말에 보고해야 했다. 그리고 7년을 기한으로 정리곡이 40,000석에 이르게 되면 원곡(原穀)을 만들되, 매년 거두어들인 모곡으로 거두어들인 것은 화성행궁을 정리(整理)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였다.
정리곡을 설치 목적에 부합하고 운영 과정에 농간이 없도록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1798년(정조 22) 정조는 전국의 정리곡을 화성에 속하게 하되 화성에서는 모곡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화성 이외의 곡물은 상진청(常賑廳)에 속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