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1711년(숙종 37) 북한산성 축성 뒤 이듬해에 이유(李濡)의 건의로 경리청이 설치되어 산성의 사무를 담당하였다. 경리청의 명칭은 도제조(都提調) 이이명(李頤命)에 의해 붙여졌다.
산성이 축성된 후 병사나 수사의 경력을 가진 자를 임명하였으며, 처음에는 행궁소위장(行宮所衛將), 도별장(都別將) 등으로 불리다가 1722년(경종 2)에 관성장(管城將)으로 개칭되었다. 축성에 참가한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 3군문 대장이 으레 제조를 겸하였으며, 군문에서는 감관(監官)을 파견하여 산성을 분담, 관리하였다. 이는 산성 안에 군량미 5, 6만 석을 비축하기 위해 전담할 기관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속대전』 규정에 의하면, 경리청의 관원은 영의정이 겸찰한 도제조(都提調) 1원을 비롯하여, 비변사 당상이 겸임하는 제조(提調) 1원, 비변사 낭청(郎廳)이 겸임한 낭청(郎廳) 1원이 있었으며, 군관 4원, 서리 4인이 있었다. 북한산성에는 이와 별도로 관성장 1원, 파총(把摠) 1원 및 초관(哨官) 5원, 기패관(旗牌官) 5원, 군관 11원, 요사군관(料射軍官) 20인, 각색 군관 3원, 성문부장 3원 등이 있었다.
경리청은 3군문의 보미(保米)를 비롯하여 환곡, 조지서(造紙署)에서 제조한 지류의 판매 등을 통해 재력을 크게 늘렸다. 그러나 산성의 수비, 창고의 설치 및 군량의 운반, 및 주변 지역에 분급된 환곡운영과 관련된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숙종 말부터 이미 경리청의 폐단이 논의되었으며, 혁파 논의마저 대두되었다. 1747년(영조 23)에 경리청은 군영체제의 재정비로 총융청(摠戎廳)에 합해졌다. 1891년(고종 28) 서울의 방비를 위해 북한산성의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통영(統營)에 속해 있던 총융청군을 분리하여 경리청을 다시 설치하였지만,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경리청의 위치는 한성부 중부 향교동(鄕校洞)이었으며, 북한청(北漢廳)은 태고사(太古寺) 곁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