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등으로 굶는 사람 혹은 토지에서 이탈하여 떠도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을 것을 지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5세기 세종대에는 흉년이 든 고을의 굶주린 사람들에게 죽을 지급하는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은 본거지를 떠나 농작 상황이 비교적 나은 곳이나 서울로 이동하여 구걸하며 목숨을 연명하였다.
17세기에도 자연재해로 인하여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왕조 정부의 기본적인 정책은 죽을 먹이고 약간의 식량을 지급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국가가 보유한 비축 곡물이 증가하자 조선의 진휼정책은 죽을 지급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곡식을 무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 곡식을 지급하더라도 죽의 지급을 중지한 것은 아니었다. 곡식을 지급하는 날에는 곡식을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죽을 지급하였다. 18세기 들어서는 1일 죽의 지급량과 곡식 지급량을 나이와 남녀의 성별에 따라 차등 있게 지급하는 변화를 보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자연재해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때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환곡을 나누어 주었지만, 토지가 없어 환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을 지급하여 목숨을 보존하도록 하였다. 진제장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뜨거운 죽을 급하게 먹고 죽는 일이 많았으므로, 죽을 지급하기 전날 밤에 죽을 쑤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식은 죽을 주도록 하였다.
[내용 및 변천]
15세기 이후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굶주린 사람에 대한 대책은 근거지에서 굶는 사람들을 우선 구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떠도는 사람들은 서울과 농작 상황이 좋은 곳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풍년든 지역에서는 이들의 이동을 막기도 하였다. 떠도는 기민(飢民)에 대한 원칙적인 정책은 본적지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본적지로 돌아가서 생존이 가능할 경우에만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웠다.
17세기 후반에 굶주린 사람들에 대한 구제가 죽의 분급에서 죽 대신 주던 곡식인 건량(乾糧)의 무상분급으로 변화하였다. 건량의 분급에는 죽을 지급하는 것보다 많은 곡물이 필요하였다.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환곡이 증가하는 상황과 일치하고 있었다. 또한 진휼정책이 토착민 위주로 전환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건량을 지급한다고 하더라도 죽의 지급을 폐지한 것은 아니었다. 건량을 지급하는 날에 역시 죽을 지급하였는데, 대체로 건량을 무상으로 지급한 양은 10일 분량이었다. 17세기 이전에는 죽의 지급량이 일정하지 않았는데,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성인 남자 1일당 쌀 4홉에서 5홉으로 증가해 갔으며, 18세기 후반에는 성인 남자는 1일 쌀 5홉으로 확정되어 10일 치의 식량을 받게 되었고, 19세기에도 이어졌다. 성인 여자는 1일 쌀 4홉, 50세 이상의 연령층은 쌀 4홉, 11세에서 15세는 쌀 3홉으로 확정되었으며, 이 기준은 죽의 지급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의의]
굶주린 사람에게 죽을 지급하는 정책은 빈궁한 사람을 구제하고 떠도는 사람들을 본거지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떠도는 기민은 고향으로 되돌아가도 생존할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큰 효과를 보진 못하였다. 17세기 후반 이후 환곡의 증가로 인하여 비축 곡물을 확보한 왕조 정부는 진휼정책을 죽의 지급을 중심으로 하던 것에서 건량의 지급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건량을 지급할 때에도 죽을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