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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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救急)

서지사항
항목명구급(救急)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진휼(賑恤)
관련어진식(賑式), 공진(公賑), 사진(私賑)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당장 구제하지 않으면 생명을 보존하기 힘든 황급한 상태의 굶주린 기민을 뽑아 긴급 구제하는 것.

[개설]
조선후기의 진휼정책은 17세기 후반 이후 죽을 지급하는 것에서 건량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환곡을 통한 비축 곡물의 증가가 원인이었다. 또 기민에게 무상으로 지급하는 곡물의 양을 남녀와 나이를 구별하여 차등 있게 지급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16세에서 50세에 이르는 남자에게는 1일당 쌀 5홉을 기준으로 10일 치를 한 달에 3회 지급하는 규정이 마련되었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1일당 쌀 3홉·4홉의 지급 양이 규정되었다. 이러한 진휼 규정을 진식(賑式)이라고 하였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서 소요되는 곡물의 양을 좀 더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진휼에 소요되는 곡물을 국가 보유 곡물인 공곡(公穀)에서 사용하면 공진(公賑)이라고 하고,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을 사용하면 사진(私賑), 진휼한 사람이 적어서 공곡을 사용하지 않으면 구급이라고 하였다.

구급은 매월 10일 간격으로 3회의 무상 분급을 실시하는 진식 규정을 따르지 않았다. 구급은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사진과 같았으나, 단지 신속함에서 차이가 났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들어서는 사진을 할 경우에도 공곡을 사용하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으며, 구급을 할 때에도 공곡을 사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는 왕조 정부가 재정 형편상 공진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사진과 구급의 시행에 공곡의 일부를 보조한 것이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큰 흉년이 들었을 때 부황이 든 기민은 다음 해에 진휼사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기다릴 수 없기 때문에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로 구급을 시행하여 목숨을 겨우 이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진휼사업이 예정된 고을뿐만 아니라, 공진이나 사진을 시행하지 않는 고을이라도 긴급조치가 필요할 경우에는 연말이나 연초에 구급을 시행하였다.

[내용 및 변천]
구급은 일정한 원칙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흉년이 심한 경우에는 12월에도 시작할 수 있고, 1회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공진처럼 몇 차례 시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진식의 규정처럼 나이와 성별에 따라 10일 치 쌀 3·4·5승을 지급한 것도 아니었다. 지방관이 마련한 곡물의 양을 적당히 지급하였다. 기민의 수가 많으면 감영에서 곡물을 지급하여 구급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본읍구급과 구별하여 영문구급(營門救急)이라고 하였다.

진휼이 끝나고 지방관을 포상할 때에는 원칙적으로 공진읍의 지방관만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사진읍의 지방관도 표창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원칙적으로 공진을 시행할 경우에만 중앙관아의 곡물을 사용하도록 한 이유는 진휼에 사용하는 국가의 비축 곡물을 가능하면 줄이려는 의도였다. 사진이나 구급을 시행할 때에 사용되는 곡물은 지방관이 독자적으로 마련하여야 하였다. 그러므로 흉년이 들면 지방관은 자비곡을 마련하고, 부민들이 스스로 곡물을 바칠 수 있도록 독려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조선왕조 정부는 진휼의 규정을 세분함으로써 많은 곡물을 절약하는 한편, 지방 수령에게 진휼을 독려할 수 있었고, 진휼을 시행하는 범위를 확대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전후시기에 비하여 자연재해의 강도가 심하게 나타나지 않았지만 활발한 진휼을 시행할 수 있었다. 정조대에 진휼 행정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기반은 정책적으로 진휼의 규정을 세분화하여 지방 수령의 책임을 강조하고 영조대에 마련한 비축 곡물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의의]
17세기 후반 이후 환곡의 증가로 인해 흉년에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하는 진휼사업이 활발할 수 있었다. 흉년이 든 다음 해 1월부터는 국가에서 보유하는 곡물을 사용하여 월 3회 기민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하는 공진, 수령이 마련한 곡물로 월 3회 무상으로 분급하는 사진, 그리고 수령이 마련한 곡물로 진식 규정을 따르지 않고 형편에 따라 지급하는 구급을 시행하였다. 19세기에는 구급을 할 때에도 공곡을 사용하는 사례가 있었다. 이는 왕조 정부가 재정 형편상 공진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못하고 다만 사진과 구급을 시행할 때에 국가 보유 곡물을 일부 보조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 『목민심서(牧民心書)』
■ 『사정고(四政考)』
■ 『호남진기록(湖南賑飢錄)』
■ 『진휼등록(賑恤謄錄)』
■ 문용식, 「18세기 후반 진휼사업과 진자 확보책」, 『사총』 44 , 1995.
■ 정형지, 「숙종대 진휼정책의 성격」, 『역사와 현실』 25, 1997.
■ 정형지, 「조선후기 진휼정책 연구-18세기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 [집필자] 문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