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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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분(田分)

서지사항
항목명전분(田分)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전품(田品)
관련어연분(年分), 공법(貢法), 양전(量田)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생산량을 기준으로 토지를 동일한 단위로 묶기 위하여 토지의 비옥도에 등급을 매기는 일.

[개설]
농업이 산업의 근간인 조선에서는 토지의 면적을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세를 부과하는 작업이 국가의 재정 운영에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선에서는 토지 면적을 파악하는 방식으로, 토지의 절대 면적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생산량을 산출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면적의 토지를, 동일한 단위로 묶는 결부법을 활용하였다. 즉, 해당 토지의 절대 면적은 다르더라도 동일한 결로 파악된 토지에서는 동일한 생산량이 산출되고, 이에 따라 동일한 세액이 부과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그러나 개별 토지의 비옥도를 정확하게 반영하여 토지마다 다른 면적으로 결을 만들 수는 없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토지를 몇 개의 등급으로 파악한 이후, 해당 등급의 토지는 동일한 생산력을 갖는다고 가정하였다. 이후 각 등급의 토지는 얼마의 절대 면적을 1결로 묶는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리고 각 등급별로 토지를 측량하는 기준을 달리하여 결 단위로 양전(量田)하였다. 이렇게 되면 전국의 토지가 국가가 정한 몇 등급으로 편제되고, 이를 통하여 동일한 결 단위로 양전할 수 있었다.

이렇듯 결 단위로 토지를 양전하기 위하여 토지의 비옥도 등을 고려한 등급 판정을 전분이라고 하였다. 전분을 위하여 토지 비옥도와 수리(水利) 여건 등을 가장 크게 고려하였으며 토지의 입지 등도 함께 고려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건국 초에는 전국의 토지를 상·중·하의 3등급으로 분류하여 각각 20지척(指尺), 25지척, 30지척을 기준 척으로 하여 양전하였다. 이에 따르면 각 등급마다 토지의 한 변의 길이 비율은 4:5:6이 되며, 면적비는 16:25:36이 되었다.

이러한 전분 방식은 세종 집권 기간에 공법의 도입이 논의되면서 크게 바뀌었다. 기존의 답험법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세액을 차례로 줄여 주는 정률세(定率稅)였다. 세종은 국가 수입을 예측하기 어려운 정률세 대신 풍흉에 관계없이 일정량의 수입을 예상할 수 있는 정액 세제(稅制)를 기획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구상을 현실화한 것이 바로 공법이었다. 그러나 관료들은 현실적으로 풍흉에 따른 작황의 편차가 커서, 풍흉을 고려하지 않은 정액세는 안정적인 운영이 어렵다고 반대하였다. 이에 따라 애초의 의도와 달리 공법은 종래의 정률세 방식을 고수하되, 세금을 부과하는 기준인 토지의 품질과 작황에 대한 판단을 더욱 세분화·정교화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분에 대한 내용 역시 세분화되었다.

우선 국가 농토의 대부분이 하등전에 속해 있는 점을 고려하여, 하등전을 3등급으로 세분화하였다. 이에 따라 종래 상·중등전의 토지에 하등전을 3분하여 총 5등급의 토지로 전분하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후 하등전보다 더 열등한 토지를 다시 6등전으로 편입시켜, 총 6등급의 토지를 전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와 함께 해마다의 풍흉을 고려하여 토지를 총 9등급으로 나누어 수세하는 방침이 마련되었다. 즉, 전분 6등, 연분 9등을 골자로 하는 공법이 최종 결정된 것이었다[『세종실록』 26년 11월 13일].

[내용]
세종대 공법 도입 과정에서 결정된 전분 규정은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되었고, 이후 『대전회통』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준수되었다. 우선 1등전의 절대 면적은 38무(畝)로 설정되었고, 이후 등급이 낮아질수록 절대 면적이 증가하였다. 6등전의 경우는 152무로 1등전의 4배에 달하였다. 종래 상·중·하로 토지 등급을 나누었을 때 상등전과 하등전의 면적비가 약 1:2.5였던 것에 비하면 그 편차가 훨씬 커진 것이다.

각 등급의 토지를 측량하는 기준 역시 변하였다. 종래 지척에서 주척(周尺)을 사용하도록 바꾸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1등전의 기준 척은 4척 7촌 7분이었으며 6등전은 9척 5촌 5분의 기준 척을 사용하도록 규정되었다. 따라서 실제 양전에 임하는 담당자들은 총 6종류의 기준 척으로 양전 작업을 진행하였다.

[변천]
세종대 확정된 전분 판정 규정은 조선후기까지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전 방식에서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양전 과정에서 6개의 기준 척을 모두 사용하지 않고, 1등전 기준 척으로 모든 토지를 측량한 후 해당 토지 등급의 면적으로 환산하여 계산하는 양전법이 사용되었다. 『속대전』에는 이렇게 1등전 척을 이용하여 양전한 후 다시 각 등급으로 환산하는 작업을 해작(解作)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양전법이 사용된 것은 효종대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효종대 양전 원칙을 기재한 『전제상정소 준수 조획』에는 1등전 척으로 양전한 것을 2등전부터 6등전까지 토지로 환산하는 방법이 아울러 기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강제훈, 『조선 초기 전세 제도 연구: 답험법에서 공법 세제로의 전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2.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Ⅰ』, 일조각, 1984.
■ 이재룡, 『조선 전기 경제 구조 연구』, 숭실대학교 출판부, 1999.

■ [집필자] 이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