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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한강을 통한 조운 업무를 담당하고, 조운선을 관리하던 전함사 소속의 정5품 관직.
[개설]
조선의 조세는 조운(漕運)을 통해 한양으로 상납되었다. 조운은 크게 바닷길을 이용하는 해운(海運)과 내륙 수로를 이용한 수운(水運)으로 나뉘었다. 그중 수운은 한강 수로를 활용한 것으로써 크게 2가지 길이 있었다. 황해도에서 임진강 등을 통해 한강 하류로 서울에 진입하는 길과 한강의 상류를 타고 서울로 진입하는 길이 있었다.
조운은 국가의 재정 운영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정부는 건국 초부터 조운의 정비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조운 과정을 관리·감독하는 조전경차관(漕轉敬差官) 등을 여러 차례 파견하였는데, 이때의 경차관은 임시 직책이었다[『문종실록』 1년 5월 26일]. 이후 세조대에 수운판관과 해운판관을 정직으로 설치하면서, 조운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이들로 하여금 담당하게 하였다. 특히 수운판관은 경기좌도와 경기우도에 각 1명씩 설치하였는데, 좌도수운판관은 한강 상류로 진입하는 길을 담당하였고, 우도수운판관은 한강 하류에서 거슬러 진입하는 길을 담당하였다[『세조실록』 12년 4월 8일].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 규정된 수운판관의 가장 큰 업무는 조운선의 관리였다. 『경국대전』에는 조운선을 소홀히 간수하여 썩어 부서지게 하거나, 잃어버리거나 혹은 불에 타게 하면 수운판관과 해운판관을 중죄로 논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조선왕조실록』에서 수운판관의 역할을 살펴보면, 조운 시 조운선을 인솔하는 업무, 노를 젓는 격군(格軍)들을 관리·감독하는 업무, 전세(田稅) 운반이 기한 내에 끝날 수 있도록 수송 시기를 관리하는 업무 등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수운판관은 조운 과정 전반에 걸친 업무를 수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변천]
조선후기가 되면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조운 외에도 각종 개인 소유의 선박을 활용한 사선(私船) 조운이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곡물 외에 포(布)나 동전 등으로 세금을 내는 경우도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조운에 대한 국가의 관리·감독의 영역이 조선전기에 비해 대폭 축소되었고, 조운에 대한 재정의 의존도도 약해졌다. 이에 따라 수운판관의 필요성 역시 현저히 감소하였다. 우도수운판관은 『속대전』 편찬 당시 이미 없어졌으며, 좌도수운판관 역시 정조 3년(1779)에 혁파되었다.[『정조실록』 3년 11월 18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최완기, 「조선 전기 조운시고(漕運試考): 그 운영 형태의 변천 과정을 중심으로」, 『백산학보』 20,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