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정의]
조선 건국 이후 왕실의 사유재산을 관리하고 궁궐 안에서 사용하는[內用] 미포(米布)·잡물(雜物)·노비(奴婢)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하기 위해서 설치한 기구.
[내용]
조선 건국 이후 왕실의 사유재산[私藏]은 원래 국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본궁(本宮)에서 관리했다. 그러다가 늦어도 1423년(세종 5) 이전부터 내수소(內需所)가 설치되어 관리했는데, 1430년(세종 12)에 이르러서 내수별좌(內需別坐)를 내수소(內需所)로 제도화시켰다. 그런데 함길도(咸吉道) 여러 읍에는 내수소 소속의 해척(海尺)과 응사(鷹師) 300호(戶)가 있어서 내수소는 실제로 궁(宮)이라고 일컬어서 하나의 궁방(宮房)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내수소는 정부의 관사(官司)들에 적용되는 통상적인 계통을 밟지 않고 담당 업무를 수행하다가 1457년(세조 3) 이후부터 다른 관사와 같이 전지(傳旨)를 내린 뒤에 시행하도록 했고, 계품(啓稟)할 경우 단자(單子)를 승정원이나 혹은 승전환관(承傳宦官)에게 제출하도록 했다.
다시 1466년(세조 12) 1월의 관제개혁 때 내수사로 명칭이 바꾸면서 정5품 전수(典需)·정6품 부전수(副典需)·종7품 전회(典會)·종8품 전곡(典穀)·종9품 전화(典貨)를 두었으며[『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내수사는 왕실의 사유지와 수조지 경영, 본궁 및 내수사의 장리 운영, 노비 탈점 등을 통해 왕실재정을 경영하면서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특히 내수사 장리와 노비의 탈점이 더욱 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