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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감(軍資監)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미곡 등 각종 물품[軍需儲積]들을 관장하는 정3품아문이었다. 본감(本監)은 도성 안의 광통교(廣通橋) 부근에, 강창(江倉)은 용산강(龍山江)에, 별창(別倉)은 송현(松峴)에 있었다.
군자감은 군려(軍旅)의 양향(糧餉) 등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정3품 판사(判事) 2명, 종3품 감(監) 2명, 종4품 소감(少監) 2명, 종5품 승(丞)·겸승(兼丞) 각 1명, 종6품 주부(注簿) 3명, 종6품 겸주부(兼注簿) 1명, 종7품 직장(直長) 2명, 정8품 녹사(錄事) 2명이 배치되었다. 그 뒤 1403년(태종 3) 관제개혁 때 연경궁(延慶宮)을 군자감에 합쳤으며, 1414년(태종 14)에는 군자감 감을 정(正), 소감을 부정(副正), 감을 판관(判官)으로 각각 고쳐 불렀다. 1466년(세조 12)에는 군자감의 녹사 1명을 혁파하는 대신, 판관·주부·부봉사·참봉을 각각 1명씩 더 두었고, 다시 1469년(예종 1)에 판관·주부·직장은 각각 1명씩 증원하였다.
2. 군자감 창고의 조성과 변화
반드시 일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년 전국 각지로부터 서울의 군자감으로 수납(輸納)되는 군자전세(軍資田稅)는 약 50,000석에 달하였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서울의 군자창[軍資本監, 京監]만으로는 보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따로 창고를 지었는데, 그것이 송현의 분감(分監)과 용산강가의 강감(江監)이었다. 본감은 한양 도성을 건설할 때 광흥창(廣興倉)·풍저창(豊儲倉)과 함께 광통교 근처에 지었으며, 1413년(태종 13)에는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의 감독으로 용산강에 84칸 규모의 창고를 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고의 공간이 부족하여 1452년(단종 즉위년)부터 조성소(造成所)를 상설하여 매년 50칸씩 증설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결과 1463년(세조 9) 본감의 앞쪽 좌·우 민가들을 철거하고 그곳에 대창(大倉)을 준공하였다.
3. 군자감 창고의 출납 운영
군자감을 송현·용산강·본감에 분산·설치하였기 때문에 출납(出納)할 때에 관원(官員)들이 한곳에 모이게 되면 나머지 두 곳은 감수(監守)하는 관원이 없이 고지기[庫子]만 있게 되므로 도둑을 당하는 폐단이 있었다. 이런 문제들을 개선하고자 1460년(세조 6)부터 풍저창·광흥창의 예에 따라 군자 본감은 판관 1명·직장 1명, 송현은 부정(副正) 1명·직장 1명·녹사 1명, 용산강은 정(正) 1명·주부 1명·녹사 1명이 나누어 맡아 출납(出納)을 감수(監守)하도록 하였으며, 판사는 항상 본감에 출근하여 세 곳을 총괄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