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사이에서 태어난 맏아들이며, 효종에게는 형이 된다. 1625년(인조 3)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인조 15)부터 8년 동안 심양에 볼모로 억류되어 있었다. 1645년(인조 23) 귀국하였으나, 두 달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세자의 장지는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孝陵) 오른쪽에 을좌신향(乙坐辛向)으로 정했으며[『인조실록』 23년 6월 10일], 묘호는 ‘소현’이라 하였다. 소현묘(昭顯墓)는 1870년(고종 7)에 소현원(昭顯園)으로 격상되었고, 곧이어 소경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조성 상황]
묘소를 조성하는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에는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金自點)이 임명되었다. 묘의 상설(象設)은 곡장을 삼면에 둘렀으며, 혼유석 1개, 장명등 1개, 문인석 1쌍을 비롯해 마석(馬石), 양석(羊石), 호석(虎石)을 각각 2개씩 배설하였다.
[변천]
1870년(고종 7)에는 세자와 세손의 무덤을 ‘원(園)’으로 높이도록 함에 따라 소현묘는 소현원이 되었다. 그리고 곧이어 원으로 승격시킨 묘의 이름을 결정하기 위한 빈청 회의를 거쳐 소경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종실록』 7년 12월 10일].
[관련 사항]
소현묘를 조성할 때, 세자의 장례에 대해 상고할 만한 의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어 『조선왕조실록』과 이전의 사례를 참고하였다. 그중 가장 가까운 시기에 있은 순회세자의 장례에 준하여 대부분의 절차와 묘소의 상설이 이루어졌다. 순회세자는 명종의 장자로, 1563년(명종 18)에 13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서오릉 가운데 하나인 경릉(敬陵) 경내에 안장되었다. 순회묘(順懷墓) 역시 소현묘와 마찬가지로 1870년에 원으로 승격되었다가, 곧이어 순창원(順昌園)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순회세자의 장례는 세조의 장자로 나중에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예에 따랐다[『명종실록』 18년 10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