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인경황후는 1680년(숙종 6)에 천연두를 앓다가 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이에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고 전호를 영소전(永昭殿)이라 하였다. 익릉은 오늘날 서오릉(西五陵)의 하나로,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 및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인 명릉(明陵) 서쪽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성 경위]
인경왕후가 1680년(숙종 6)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이튿날 민정중(閔鼎重)을 총호사(摠護使)로, 박신규(朴信圭)·이익상(李翊相)을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로 삼고, 여성제(呂聖齊)에게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일과 겸하여 산릉도감 제조의 일을 맡겼다[『숙종실록』 6년 10월 27일]. 여러 곳을 간심한 끝에 11월 15일에 고양의 경릉(敬陵) 경내에 정남향에서 약간 서쪽으로 향하는 축좌미향(丑坐未向)의 언덕을 선택하고 산릉의 공역을 시작하였다[『숙종실록』 6년 11월 15일].
본 공역에서 주로 전례로 삼은 것은 1674년(숙종 즉위) 가을에 이루어진 숭릉(崇陵) 조성의 사례이다. 궁궐에서 발인하여 산릉에 도착한 재궁을 봉안하기 위한 영악전(靈幄殿)을 별도로 건립하지 않고 정자각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정자각의 규모는 8칸으로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고 배위청을 3칸으로 하여 확대하였다. 이는 세조 광릉(光陵)의 정자각제도를 따른 것이다.
1674년에 효종의 영릉(寧陵)을 동구릉에서 여주로 천릉하면서 정자각을 8칸으로 조성하였다. 이후 현종의 숭릉과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인현왕후의 명릉, 경종의 의릉(懿陵)에 이르기까지 정자각은 같은 규모로 조성되어 이 시기의 특색을 형성했다. 익릉의 정자각은 오늘날에도 정전의 좌우 익각이 그대로 남겨져 있어 17세기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다. 숭릉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처리된 것과는 달리 맞배지붕으로 하고 좌우에 풍판을 달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도록 하였다. 팔작지붕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길고 굵은 목재를 사용하는 추녀를 쓰지 않기 위한 계획이었다.
정자각 좌우에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각 3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나,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재실은 안향청·집사청·전사청·참봉청 등으로 구분하여 공간을 마련하였다. 안향청은 숭릉의 전례에 따라 온돌 2칸에 마루 4칸으로 구성하여 총 6칸에 팔작지붕 형태로 조성하였다. 집사청은 온돌 4칸, 마루 2칸, 중문 1칸으로 총 7칸 규모이며, 참봉청은 전퇴를 포함하여 12칸 반 규모였다.
본래 수릉관과 시릉관은 가재실에 거처하면서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으나, 숭릉의 전례를 따라 가재실의 규모를 40여 칸으로 줄여 조성하였다. 재실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익릉지(翼陵誌)』에 수록된 재실의 간가도(間架圖)를 통해 그 구성과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1681년(숙종 7) 2월 19일에 빈전을 열고 다음 날 발인하여 산릉에 도착했으며, 같은 달 22일에 현궁에 재궁을 안치하여 장사 지냈다[『숙종실록』 7년 2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