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태원전(泰元殿)

서지사항
항목명태원전(泰元殿)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복궁(景福宮)
관련어건길문(建吉門), 건숙문(建肅門), 경사합(敬思閤), 경안문(景安門), 공묵재(恭黙齋), 대서문(戴瑞門), 보강문(保康門), 보안문(保安門), 빈전(殯殿), 상례(喪禮), 숙문당(肅聞堂), 영사재(永思齋), 유정당(維正堂), 응벽문(凝碧門), 일중문(日中門), 홍경문(弘景門)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후기 경복궁에 지은 빈전(殯殿).

[개설]
태원전은 문경전(文慶殿), 회안전(會安殿)과 함께 조선전기에는 없었던 전각으로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 당시에 새로 지은 것이다. 조선후기에 빈전과 혼전(魂殿)은 침전이나 편전 등의 전각 가운데 일부를 한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빈전과 혼전 용도의 전각을 궁궐의 서북쪽에 별도로 지었다.

빈전은 왕이나 대비, 왕비 승하 후 발인하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는 전각이다. 빈전으로 사용할 의도로 경복궁에 지은 태원전은 전문(殿門)과 중문, 각각의 마당, 그리고 내재실인 영사재(永思齋)와 어재실인 공묵재(恭默齋)를 기본 시설로 갖추었다.

[위치 및 용도]
태원전이 속해 있는 빈전과 혼전 영역은 광화문(光化門) 서북쪽의 용성문(用成門)에서 어구(御溝) 남쪽으로 승화문(承和門)에 이르는 독립된 진입 동선을 가지고 있었다. 태원전은 시신을 모시는 중심 전각이고, 영사재는 내명부의 왕대비와 중궁, 세자빈 등이 사용하는 내재실이다. 공묵재는 태원전 남행각 밖에 있으며 어재실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왕은 발인 전까지 신하들을 소견하고 산릉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1895년(고종 32)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빈전을 설치했을 때에도 공묵재에서 신하들을 소견하거나 외국 공사를 접견하였다. 숙문당(肅聞堂)은 태원전 북쪽 석축 위에 있는데, 1890년(고종 27) 신정왕후(神貞王后)의 국상이 있을 때 새로 지은 것이다.

주변에 있는 일(日)자형 행각들은 평상시에는 궁궐 내 빨래를 담당하는 세답방(洗踏房)으로 쓰이다가 국장 기간 동안은 담당관의 처소와 업무 공간으로 전용(轉用)되었다. 또한 왕대비와 중궁, 세자빈 등 행례에 참석해야 하는 내명부의 인원이 많았으므로 내재실을 확장하여 동측에 있는 세답방을 내재실 일부로 사용했다.

[변천 및 현황]
경복궁에 지은 태원전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빈전으로서가 아니었다. 1872년(고종 9)에 조선 건국 480주년을 맞아 태조의 존호를 올리고,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와 원종의 어진 모사 작업을 하기 위해 잠시 어진을 태원전에 봉안하였는데, 이때 처음 사용되었다[『고종실록』 9년 4월 7일]. 어진을 모신 기간은 약 한 달 정도 되며 모사를 마친 후, 5월에 단오제를 치르고 다시 영희전으로 이봉하였다. 이때 태원전을 사용한 것은 태원전의 주 용도는 아니었고 임시적인 용도였다.

태원전이 빈전으로 처음 쓰인 것은 1890년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국상 때이다[『고종실록』 27년 4월 17일]. 1895년 건청궁(乾淸宮) 곤녕합(坤寧閤)에서 살해당한 명성황후의 빈전도 이곳에 차렸다[『고종실록』 32년 10월 15일]. 태원전이 있었던 자리에는 일제 강점기에 관리들의 관사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는 30사단이 주둔해 있었다. 2005년 궁장을 회복하고 태원전 일곽을 복원했다.

[형태]
태원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중앙의 3칸은 대청이다. 태원전 전면에서 남행각까지 복도각이 설치되어 있다. 태원전의 외삼문은 건숙문(建肅門)이다. 태원전 부속건물을 보면, 영사재는 정면 7칸, 측면 2칸이며 전면의 1칸은 복도로서 태원전의 후툇간과 연결되어 있다. 전면에 담장을 쌓아서 태원전 안마당과 차단하였고 여기에 건길문(建吉門)을 두었다.



영사재 동쪽에는 연이어 행각이 있고, 행각에는 동쪽 세답방 영역과 통하는 대서문(戴瑞門)이 있다. 공묵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으로 마루 2칸, 방 2칸, 주(廚) 1칸이고 대청에서 태원전 남행각과 복도로 연결되었다. 공묵재 북행각에는 유정당(維正堂)과 경사각(敬思閤)이 있고, 유정당의 동남쪽 사이 담에 홍경문(弘景門)이 있다. 공묵재 동쪽 세답방 남쪽 사이 담에는 보강문(保康門)이 있고, 그 남쪽에 사각문인 일중문(日中門)이 있다. 일중문 남쪽에 빈전·혼전 일곽과 그 동쪽을 구분하는 담장이 있고 거기에 응벽문(凝碧門)이 있다. 태원전 서쪽에도 일(日)자형의 행각이 있는데 이곳 또한 평상시에는 세답방으로 사용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궁궐지(宮闕誌)』
■ 『신정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神貞王后殯殿魂殿都監儀軌)』
■ 『어진이모도감의궤(御眞移摸都監儀軌)』
■ 『효모전일기(孝慕殿日記)』「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경복궁: 태원전권역중건보고서』, 문화재청, 2005.

■ [집필자] 이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