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인빈김씨(仁嬪金氏)는 14세 때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아들 정원군(定遠君)이 인조의 아버지 원종이다. 1613년(광해군 5)에 세상을 떠나자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사묘를 조성해 안장하였다. 그 뒤 1755년(영조 31)에 능역을 수리하였다[『영조실록』 31년 6월 2일].
[조성 경위]
인빈김씨는 1555년(명종 10)에 김한우(金漢祐)의 딸로 태어났다. 명종의 후궁인 숙의이씨(淑儀李氏)의 외종(外從)으로 궁궐에서 자랐는데, 14세가 되던 해인 1568년(선조 1)에 명종의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천거로 선조의 후궁이 되었다. 그 뒤 40년간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며, 뒷날 원종으로 추존되는 정원군을 비롯해 의안군(義安君)·신성군(信城君)·의창군(義昌君)과 다섯 옹주를 낳았다[『광해군일기』 5년 10월 29일]. 인빈은 1613년(광해군 5) 10월 29일에 승하하여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조성 상황]
인빈김씨는 생모를 잃은 광해군이 선조의 노여움을 살 때마다 항상 감쌌다. 그러나 광해군은 즉위 후 인빈의 선영과 그 아들 정원군의 사저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에 정원군의 집을 빼앗았고, 인빈의 장지가 매우 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늘 감시하여 역모의 빌미를 잡으려 했다[『광해군일기』 11년 12월 29일].
인조는 1623년(인조 1) 반정을 통해 즉위한 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모인 인빈김씨의 사묘를 친제하였다. 영조는 1753년(영조 29)에 어머니의 신주를 모신 사당인 ‘숙빈묘(淑嬪廟)’를 ‘육상궁(毓祥宮)’으로 격상하고, 1755년에는 인빈의 사우와 묘도 함께 격상시키고 묘역을 새롭게 수리하였다. 이것은 예외적인 대우로, 순강원의 경우 원호(園號)는 예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 뒤 1870년(고종 7)에 고종은, 이름을 함부로 고칠 수는 없으나 세자나 세손의 묘에 붙이는 원호와는 다름을 분명히 하여 『오례편고(五禮便攷)』에 기록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7년 12월 6일].
오늘날 순강원에는 망주석 1쌍, 양석과 호석 각 2개, 문인석 1쌍, 마석 2개, 혼유석 1좌, 장명등 1좌 등이 배설되어 있다. 혼유석 앞으로는 향로석이, 좌우에는 동자석이 자리 잡고 있다. 봉분 앞에는 묘비석이 있으며, 진입부에는 신도비가 조성되어 있다.
[변천]
인조는 1626년(인조 4)에 인빈의 묘를 단장하였다. 영조는 1755년(영조 31) 6월에 순강원 수리를 끝내고 궁호를 저경, 원호를 순강이라 하였고[『영조실록』 31년 6월 2일], 1768년(영조 44)에는 순강원을 봉심하면서 기울어진 동편 망주석을 보수하였다. 1870년(고종 7) 1월 2일에는 인빈김씨의 사우를 경우궁(景祐宮) 안 별묘에 모셨다.
근년에는 1989년에 거북 비각을 보수하였고, 2003년에 정자각과 비각을 수리했으며, 2005년에는 재실 보수 공사를 했다. 재실은 순강원 입구에 복원된 건물로, 행랑이나 부속물이 없고 담장으로만 둘러져 있다.
[관련 사항]
1681년(숙종 7) 역대 왕이 계승한 차례를 기재한 『어첩(御牒)』, 자손을 순서와 계통에 따라 기록한 『선원록(璿源錄)』, 원릉(園陵)의 현각(顯刻) 및 죽책(竹冊)·옥책(玉冊) 문자를 수집하며 만든 『지장통기(誌狀通記)』에는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는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종의 후궁이자 선조의 할머니가 되는 창빈(昌嬪),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더불어 인빈김씨의 지장(誌狀)은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어 별도로 한질을 만들도록 하였다[『숙종실록』 7년 8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