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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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무당(隆武堂)

서지사항
항목명융무당(隆武堂)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복궁(景福宮)
관련어경무대(景武臺), 군사훈련(軍事訓鍊), 사열(査閱), 삼촌문(三春門), 융문당(隆文堂), 이춘문(二春門), 일춘문(一春門), 춘도문(春到門), 춘생문(春生門), 춘화문(春和門)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고종대 경복궁 후원에 조성한 경무대의 전각.

[개설]
경복궁 중건이 끝나갈 무렵인 1868년(고종 5) 9월 신무문 북쪽에 넓은 공간을 확보하여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을 짓고 이곳을 경무대(景武臺)라고 하였다. 융무당은 융문당과 함께 경무대의 중심 건물로 문·무과 시험과 군대 사열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위치 및 용도]
융무당은 신무문 북쪽과 경무대 동쪽 경계를 짓고 있다. 왕이나 왕세자가 참석하여 이곳에서 군병들에게 활쏘기 시험을 보거나 호궤(犒饋) 포상, 훈련, 무예 시범 등을 행했다[『고종실록』 6년 9월 16일].

[변천 및 현황]
일제 강점기에 융무당은 융문당과 함께 일본 불교 종단인 진언종(眞言宗)에 무상으로 대여되었고 헐린 재목은 대략 1928년 8월 이후 당시 서울 한강통에 있던 일본 사찰인 고야산(高野山) 용광사(龍光寺)의 건물이 되었다. 이 건물들은 원불교(圓佛敎) 서울 교당으로 2006년까지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전라남도 영광의 원불교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옮겨 세워졌다.

[형태]
융무당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아서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 2칸, 좌우에 방이 1칸씩 있고 전·후퇴가 있는 구조이다. 공포는 물익공이고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했다. 전면에 넓은 월대가 있으나 건물의 규모와 월대 높이, 익공 형식 등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다. 월대 위에 좌우로 협문과 3칸씩의 행각이 있는데, 북쪽의 협문은 본시문(本始門)이다.

건물 뒤편을 담장으로 둘렀는데 남쪽에 있는 문이 일춘문(一春門), 북쪽에 있는 문이 이춘문(二春門)이다. 융무당의 북측 월대에서 북쪽으로 담장이 있어 융문당까지 연결되는데, 이 담장의 뒷마당에 있는 문은 삼춘문(三春門)이다.

융무당에서 좌측에서 남쪽으로 11칸의 행각이 있고, 행각에서 남쪽으로 경복궁의 북쪽 궁성까지 담장이 있다. 담장에 일각문이 있기는 하지만, 이 영역은 서쪽의 추성문에서 출입하는 것이 주된 통로였으므로 융무당이 있는 경무대의 영역은 여기까지이다. 동쪽 담장 너머는 수궁(守宮)이 있고 그 동쪽 춘도문(春到門) 안은 궁궐 숙위를 담당하는 금위군직소(禁衛軍直所)의 영역으로, 후원 외궁장의 춘생문(春生門)과 그 안쪽의 춘화문(春和門)이 금위군직소의 영역에 포함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고종대 융무당은 군사훈련과 사열 이외에 백성들에게 미곡을 나누어주는 구휼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북궐도형(北闕圖形)」
■ 대통령경호실 편, 『청와대와 주변의 역사·문화유산』, 대통령경호실, 2007.

■ [집필자] 이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