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장렬왕후는 1638년(인조 16) 인조와 가례를 올리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1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고, 1651년(효종 2)에는 자의(慈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효종 10)에는 효종이 승하하고, 이어 1674년(현종 15)에는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승하하자 그 복식이 문제가 되어 예송 논쟁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1688년(숙종 14)에 승하하였는데, 경기도 양주군에 자리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옆 유좌(酉坐)의 언덕에 묻혔다.
[조성 경위]
장렬왕후는 1688년(숙종 14) 8월 26일, 창경궁 내반원(內班院)에서 승하하였다. 문정전(文政殿)에 빈전과 혼전을 차렸고, 산릉은 오늘날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건원릉 옆으로 결정하였다. 장렬왕후의 산릉을 이곳으로 정한 것은 인조의 능인 장릉(長陵)에는 이미 원비인 인렬왕후(仁烈王后)가 합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각 능의 국내(局內)를 살핀 끝에 건원릉 옆 유좌묘향(酉坐卯向)의 길지를 선택하였고, 그해 12월에 발인하여 국장을 치렀다[『숙종실록』 14년 12월 16일].
[조성 상황]
휘릉의 현궁(玄宮)은 회격분(灰隔墳)으로 조성되었다. 능상은 봉분을 만들어 난간석을 둘렀으며, 뒤쪽에는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두었다. 봉분 상계(上階)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설치하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맞배지붕의 정자각은 정전(正殿) 3칸에 좌우 익각(翼閣), 배위청(拜位廳) 3칸으로 이루어진 8칸 규모로 조성되었다.
[변천]
휘릉의 정자각은 1762년(영조 38)에 처음 중수되었다. 이어 1770년(영조 46)에 새로 사초(莎草)하고 곡장이 무너진 것을 수리하였으며, 1793년(정조 17)에 다시 한 번 정자각을 수리했다. 1865년(고종 2)에는 여름 폭우로 여러 능이 사초가 내려앉고 곡장이 무너지는 등의 해를 입었는데, 이때 휘릉의 곡장도 무너져 개수하였다.
또한 1879년(고종 16)에는 동구릉에 속한 모든 능의 비각과 정자각을 수리하였다. 1897년(고종 34)에는 5월 20일 새벽에 화재로 휘릉의 정자각이 타 버리자, 봉상시(奉常寺) 제조(提調) 이우면(李愚冕)과 조정희(趙定熙)를 중건청(重建廳)의 당상으로 삼아 중건 공사를 진행했다[『고종실록』 34년 10월 31일]. 상량문(上樑文)은 홍문관(弘文館) 태학사(太學士) 김영수(金永壽)가 지어 올렸다
[관련 사항]
휘릉은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다른 조선 왕릉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