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숭릉은 오늘날 동구릉(東九陵)의 가장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1674년(현종 15) 8월에 현종이 승하함에 따라 처음 조성되었으며, 1683년(숙종 9)에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승하한 뒤 이듬해에 합장되었다. 하나의 언덕에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위치하는 쌍릉이다. 정자각은 좌우에 익각을 갖추어 5칸을 이룬 정전과 3칸의 배위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타의 정자각과 달리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조성 경위]
현종은 1674년 8월 18일, 그의 어머니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국상 중에 창덕궁의 여차(廬次), 즉 상주의 거처에서 승하하였다. 다음 날 김수항(金壽恒)을 총호사(摠護使)에, 이정영(李正英)·민정중(閔鼎重)·이원정(李元禎)을 산릉도감(山陵都監) 당상(堂上)에 임명하였으며, 영창군(瀛昌君) 이침(李沉)을 수릉관으로 삼아 산릉에서 삼년상을 치르게 하였다[『숙종실록』 즉위년 8월 19일].
숭릉의 조성은 현종의 비인 명성왕후의 의견에 따라 백성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산릉의 역사를 줄이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숙종은 명성왕후의 뜻에 따라, 능을 조성할 터를 선택할 때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건원릉이 조성된 산자락에 산릉을 설치하고 묏자리를 구하려고 산을 돌아보는 간산(看山)의 절차를 생략했다. 또한 명성왕후의 사후에 쌍릉으로 만들 것을 미리 고려하여, 현종의 능을 정혈(正穴)을 쓰되 쌍릉으로 만들 공간이 부족하면 보토해 두도록 명하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13일].
또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숭릉의 능 위에 배치할 석물은 옛 영릉(寧陵)의 석물을 재사용하도록 하였다.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승하했을 때, 처음에는 그 능인 영릉을 건원릉(健元陵) 서쪽 산줄기에 조성하였다. 그 뒤 1673년(현종 14)에 여주에 있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 곁으로 천장하였다. 이때 기존의 석물을 땅에 묻어 두었는데, 이를 새롭게 조성하는 숭릉의 석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15일]
그리고 영악전(靈幄殿)을 설치하지 않고 원래 영악전에서 행하던 의례를 정자각에서 하도록 했다. 상을 치를 때는 궁궐에서 발인하여 재궁을 모시고 산릉에 도착한 뒤 바로 장사 지내지 않고 길일을 기다렸는데, 그동안 재궁을 모셔 두기 위해 영악전을 조성하였다. 재궁을 모시는 일은 흉례에 속하므로 길례를 지낼 정자각에서 하기 어려워 따로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단 며칠 동안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마련하는 것은 많은 목재와 공역이 소모되는 비효율적인 일이므로 영악전을 별도로 조성하지 않고, 그 대신 규모와 형태가 유사한 정자각을 이용하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는 신하들도 있었다. 조감(趙瑊)은 상소를 통해, 영릉(寧陵)의 석물을 새 산릉에 옮겨 쓰도록 한 것과 영악전을 설치하지 않은 일을 아비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들을 제사하는 일에 비유하였다[『숙종실록』 즉위년 9월 29일]. 옛 능의 석물을 새로운 능에 사용하는 일이나, 흉례와 길례처럼 구별되는 의례를 한 공간에서 행하도록 한 것 등은 당시로서는 그만큼 혁혁한 변화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석재 및 목재의 수급과 인력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건축 자재의 재사용은 당연한 일이 된다. 또 1674년(숙종 즉위)에 영악전 제도를 폐지한 이후 이는 전례(前例)가 되어, 정자각 내부를 흉례에 맞게 배설하여 재궁을 안치했다가 장례가 끝나면 길례에 맞게 다시 내부 공간을 배설하는 방식으로 정자각을 활용하게 된다.
가재실의 규모를 축소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산릉의 건축 공역을 줄이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재실로 사용하는 가재실의 규모를 줄인 것이다. 가재실은 수릉관과 시릉관의 입접처 외에 재물을 조성하는 여러 각색(各色)들의 공간이 포함되어 규모가 대개 90여 칸에 이르렀다. 그런데 숭릉을 조성하면서 수릉관과 시릉관의 입접처를 따로 만들지 않고 정재실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가재실의 규모를 40여 칸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 역시 이후 ‘갑인년 전례’가 되어 새로 산릉을 조성할 때 적용되었다.
숭릉 조성 과정에서 이루어진 여러 변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명성왕후는 현종이 승하한 뒤 9년이 지난 1683년(숙종 9) 12월 5일에 승하하였다. 1674년에 숭릉을 조성할 때 왼쪽을 비워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둔 바대로, 1684년(숙종 10) 4월 5일 숭릉에 부장(祔葬)되었다.
[관련 사항]
숭릉의 정자각은 다른 왕릉과 달리 팔작지붕에 8칸 규모로 되어 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조선 왕릉의 정자각 가운데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구성된 8칸 정자각은 숭릉·익릉(翼陵)·휘릉(徽陵)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팔작지붕으로 조성된 것은 숭릉이 유일하다. 사실 8칸 정자각은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이 조성된 이후 선릉(宣陵)·정릉(貞陵)·효릉(孝陵)·강릉(康陵)·장릉(莊陵) 등에 꾸준히 건설되었다. 그러나 유지 보수 과정에서 익각이 사라지고 대부분 정전 3칸에 배위청 3칸으로 변형되어 8칸 정자각은 쉽게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숭릉의 정자각은, 1673년(현종 14)에 효종의 능인 영릉을 여주로 옮겨 가면서 광릉을 표본으로 삼아 정자각의 정전 좌우에 익각을 갖추어 8칸 규모로 조성한 것을 따른 것이다. 그 뒤 익릉·휘릉·의릉(懿陵)·명릉(明陵)의 정자각도 모두 8칸으로 조성되었지만, 지붕은 추녀를 사용하지 않는 맞배지붕으로 간소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