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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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숭도감(尊崇都監)

서지사항
항목명존숭도감(尊崇都監)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도감(都監)
관련어존호도감(尊號都監), 상호도감(上號都監), 존호(尊號), 존숭도감의궤(尊崇都監儀軌)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왕·왕비·왕대비 등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주관하던 임시 관청.

[개설]
조선시대 왕실에서 존호를 올리는 의식은 존호도감(尊號都監)·상호도감(上號都監)·존숭도감에서 추진하였다. 존호를 올리는 의식은 같았지만 명칭을 달리하였고, 의궤의 기록에도 『존호도감의궤』, 『존숭도감의궤』, 『상호도감의궤』로 구분하였다. 존호는 상왕이나 대비로 존숭할 때, 경사나 공덕을 기릴 때, 왕과 왕후의 초상 및 부묘할 즈음에 호를 올려 존숭의 뜻을 표시하였다. 왕에게는 대개 2자의 시호와 8자의 호를 모두 초상에 올렸으며, 왕후는 초상에 2자의 시호만 올린 후 왕이 승하하여 종묘에 부묘(祔廟)할 때 4자의 호를 올렸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존숭도감은 왕실에서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주관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연산군일기』에는 1505년(연산군 11) 6월에 존숭도감을 설치하여 스스로 존호를 올리고 대비전에도 아울러 존호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연산군이 자신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처음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중종대에는 존숭도감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이후에도 존호를 올리는 의식은 필요하여 존숭도감은 계속 유지되었다.

[조직 및 역할]
『연산군일기』에 “영의정 유순을 존숭도감 영사(領事)로 삼고, 이조 판서 김수동, 병조 판서 임사홍, 예조 판서 김감을 제조로 삼았다.”[『연산군일기』 11년 6월 11일] 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는 영사-제조의 조직으로 설치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대부분 도제조-제조-낭청과 같이 여타 도감의 조직과 동일하게 구성되었다. 도제조는 정승급에서, 제조 3명은 판서급에서 임명했음을 알 수 있다. 존숭도감의 역할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옥보(玉寶)옥책(玉冊) 및 의장 물품의 조달, 덕을 기리는 글의 문체(文體) 결정, 금정(金鼎)의 모양 제작, 참여 존호 악장(樂章)의 작성, 장인들에 대한 급료 지급 등이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연산군대에 처음 존숭도감이 구성되었다. 광해군대에는 특히 존숭도감에 관한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광해군이 정통성의 부족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실의 존숭 작업에 진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전기에는 대부분 상왕 또는 왕대비, 대왕대비로 존숭할 때 존호를 올렸다. 경사나 공덕을 이유로 존호를 받은 이는 세조, 연산군, 선조, 광해군 및 그 왕비들이었다.

광해군대 존숭도감이 자주 구성된 것에 비하면, 인조에서 경종대까지는 존숭도감이 비교적 필요에 따라 절제되면서 구성되었다. 존숭도감을 설치하여 존호를 올리고 의궤를 제작한 사례를 보면, 1621년(광해군 13)의 『(광해조)존숭도감의궤』가 최초이다. 이 의궤에는 광해군과 중전이 존호를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1624년(인조 2)의 『(인목왕후)존숭도감의궤』, 1651년(효종 2)의 『(인조장렬왕후)존숭도감의궤』, 1661년(현종 2)에 제작된 『(인조비장렬후이존호)존숭도감의궤』, 1676년(숙종 2)의 『(인조비장렬후삼존호)존숭도감의궤』, 1686년의 『(인조비장렬후사존호)존숭도감의궤』 등이 존숭도감에서 제작한 대표적인 의궤들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광해군대를 제외하면, 경종대까지는 상왕이나 대비로 존숭하거나 특별한 공덕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존호를 절제하여 올렸다. 때문에 존숭도감도 특별한 경우에만 구성되었다. 그러나 영조대 이후부터는 존호를 지나치게 많이 올리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영조대 이후에 다수의 존숭도감이 설치되고 있다. 그만큼 영조대 이후에는 왕실에서 존호를 올려 존숭 의식을 표하는 빈도가 많아짐을 볼 수 있다. 특히 정순왕후, 순원왕후, 신정왕후의 사례에서 보듯이 존호를 한 번 올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많게는 10여 차례 이상 존호를 올리고 있다. 이것은 부모를 아름답게 빛낸다는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 왕실의 존숭 작업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829년(고종 29) 당시 신정왕후의 존호는 무려 24개에 이르렀으며, 왕후에게 2자의 존호를 올린다는 규례를 지키지 않고 4자를 올리기도 했다.

[참고문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분류별 의궤 해설집』,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장서각 소장 의궤 해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 [집필자] 신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