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장례 절차를 검소하게 하려 한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에 따라 석물의 규모를 정하고 정자각도 기존 왕릉과 달리 8칸이 아니라 5칸으로 조성하였다. 뒤에 정순왕후를 함께 안장하여 쌍릉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조성 경위]
영조는 1776년(영조 52) 3월 5일에 재위 52년 만에 승하하였다. 국장의 절차가 진행되면서,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묻혀 있는 서오릉의 홍릉(弘陵)에 능을 마련하려는 준비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약 보름이 지난 3월 19일에, 국상에 관한 모든 의식을 총괄하는 총호사(總護使) 등이 홍릉은 세조의 맏아들 덕종의 능인 경릉(敬陵)의 화소(火巢) 내에 있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관의 말을 들어 다른 곳에 능을 마련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에 따라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영조의 생모 숙빈최씨(淑嬪崔氏)의 묘소인 소령원(昭寧園) 동구 쪽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곳도 적당하지 않다는 반대 의견이 있어, 다음으로 구한 곳이 건원릉(健元陵)의 서쪽 자리였다. 이곳은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을 썼던 곳인데,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든다는 이유에서 여주로 천장한 뒤 비어 있었다. 정조는 하늘이 마련한 좋은 땅이라는 지사들의 평가를 듣고 최종적으로 이곳을 산릉지로 정하고, 드디어 능호를 원릉이라 하였다. 이때가 4월 9일로, 영조가 승하한 지 한 달 이상이 지난 때였다[『정조실록』 즉위년 4월 11일)] 능은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하여 남남서쪽을 향하도록 하였다. 영조는 7월 27일 원릉에 안장되었으며, 정조는 비문의 글씨를 친히 써서 애도하는 마음을 나타냈다.
영조는 생전에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와 50년 이상을 해로했으며, 1757년(영조 33)에 왕후가 66세로 승하하자 친히 행장을 지으며 애통해했다. 그뿐 아니라 홍릉을 조성하면서, 왕후의 봉분 오른쪽에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기까지 하였다[『영조실록』 33년 5월 13일]. 그럼에도 홍릉에 안장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건원릉 서쪽에 능을 조성하게 된 이유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생존해 있던 계비 정순왕후의 존재를 의식하여, 향후 영조의 능에 계비가 함께 안장될 수 있도록 한 조처로 짐작된다. 실제로 1805년(순조 5)에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영조의 능침 왼쪽에 안장하였다[『순조실록』 5년 6월 20일].
[조성 상황]
영조는 생전에 장례 제도를 간소화하라는 뜻을 자주 비쳤고, 1758년(영조 34)에는 『국조상례보편』을 편찬하여 산릉 제도를 정비하였다. 그에 따라 원릉에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고 간단히 난간석만 둘러 봉분의 경계를 지었으며, 석물들도 비교적 간소하게 조성하였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춘관통고(春官通考)』에 따르면 원릉의 난간석은 12칸이며, 혼유석은 길이가 13자, 너비가 8자 7치에 두께가 2자 5푼이었다. 장명등은 길이가 12자 5치였다. 그밖에는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4개, 문인석과 무인석 각 1쌍에 마석(馬石) 2개를 배치하여, 통상적인 왕릉의 석물 배치 방식을 따랐다. 오늘날 원릉에 남아 있는 석물을 살펴보면, 조각이 간소하고 크기도 크지 않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정자각은 『국조상례보편』에서 명시한 대로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을 설치하여, 전체 5칸 규모로 조성하였다. 이는 이전의 왕릉인 숙종의 명릉(明陵)이나 현종의 숭릉(崇陵)이 모두 정전 5칸에 배위청 3칸으로 구성된 8칸 정자각을 갖춘 데 비해 축소된 것이었다. 이 밖에 수라간과 수복방이 각각 3칸이고, 정자각 남쪽 5보 거리에 홍살문을 두었다. 홍살문 밖에는 전사청 9칸, 제기고 3칸, 안향청 6칸에 재실 8칸을 두었다.
한편 1805년(순조 5)에 정순왕후를 합장하는 과정에서는, 영조의 능침 왼쪽에 새로 흙을 높이 쌓아 보토를 하고 왕릉과 만나는 곳의 난간 일부를 헐어 내어 왕비릉을 조성하였다. 이때는 모든 격식을 같은 능역 안에 있는 숭릉의 제도를 따랐다[『순조실록』 5년 2월 16일]. 숭릉의 경우에도 현종이 1674년(현종 15)에 먼저 승하한 뒤 명성왕후(明聖王后)가 1683년(숙종 9)에 승하하면서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원릉은 두 봉분에 각각의 혼유석을 두되, 장명등은 당초 왕릉 조성 때 설치했던 것을 두 봉분의 중간으로 옮겨 놓았다[『순조실록』 5년 2월 16일]. 비각의 경우 왕릉을 조성할 때 이미 정면 2칸으로 건립했기 때문에 따로 설치하지 않고, 정순왕후의 표석을 기존 비각의 비어 있던 남쪽에 세우는 것으로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변천]
원릉이 조성되자 정조는 그해에 바로 능에 참배하였으며, 이듬해부터 1784년(정조 8)까지 거의 해마다 직접 능을 찾아가 참배했다. 원릉 참배 때는 건원릉에도 절을 올렸고, 종종 목릉(穆陵)도 찾았다. 이후의 왕들 즉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역시 친제를 행하였다. 그 사이에 봉분의 사초 수습 등 사소한 수리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879년(고종 16)에는 건원릉을 비롯해서 숭릉, 현릉(顯陵), 목릉 등 9개 왕릉의 비각과 정자각을 보수했는데, 이때 원릉의 비각과 정자각도 수리하였다[『고종실록』 16년 4월 28일]. 1890년(고종 27)에는 비각의 표석을 다시 세웠는데, 이해에 영조의 묘호를 기존의 영종(英宗)에서 격상하여 영조로 고치면서 표석의 글씨도 다시 썼기 때문이다.
[관련 사항]
건원릉 주변에는 문종의 능인 현릉, 선조의 능인 목릉,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능인 휘릉(徽陵), 현종의 능인 순릉(純陵), 경종의 능인 혜릉(惠陵)이 이미 조성되어 있었으며, 원릉은 이 일대에 자리한 일곱 번째 능이었다. 이후에 헌종의 능인 경릉(景陵)이 원릉의 서북쪽에, 순조의 아들이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능인 수릉(綏陵)이 마지막으로 원릉 남쪽에 조성됨에 따라 모두 9개의 왕릉이 자리 잡았다. 이후 이곳은 동구릉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사료에서는 1857년(헌종 8)의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仁陵遷奉山陵都監儀軌)』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동구릉은 1970년에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