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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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창(交濟倉)

서지사항
항목명교제창(交濟倉)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관창(官倉)
관련어진휼(賑恤), 교제고(交濟庫), 포항창(浦項倉), 제민창(濟民倉)
분야경제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737년 원산을 시작으로 진휼에 필요한 구호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함경도 남·북관에 설치한 창고.

[개설]
1732년(영조 8) 경상도 영일현에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하고 함경도에 보낼 진휼곡 3만 석을 비축해 두었다. 이후 함경도에도 진휼곡을 조성할 별도의 창고를 설치하자는 논의가 이어져 1737년(영조 13) 함경도 덕원·원산에 교제창을 설치하고, 원곡은 육진의 내수사 사내종이 바치는 공미(貢米) 1만 석을 이전하여 조성토록 하였다.

이전부터 육진에 사는 내수사 사내종이 신공(身貢)으로 1곡(斛)의 쌀을 포로 바꾸어 바치게 하였는데, 숙종대부터 이를 그만두게 하고 공미를 그대로 해당 고을에 비축하여 흉년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1737년(영조 13) 이 공미 1만 석을 원곡으로 하여 원산에 교제창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생각만큼 공미는 확보되지 못하여 결국 경상도에서 이전한 곡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대 경상도에 포항창을 설치한 데 이어 함경도에 교제창을 신설함으로써 함경-경상 간 빈민 구호물자인 진자(賑資) 공급책이 제도화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교제창은 포항창과 산산창(蒜山倉), 삼남제민창(三南濟民倉)과 더불어 영조대에 설치된 대규모 관창 중 하나이다. 대동법 시행 이후 포구상업이 발달하고, 동전의 유통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진휼 방식에서도 이처럼 지역 간 곡물, 화폐 이전이 적극적으로 모색되었다. 교제창은 함경도와 경상도 간 곡물 이전을 통해 진휼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치되었다.

[내용]
교제창은 설립 초에 내수사 공미 1만 석이 제대로 수취되지 않으면서 운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교제창을 설립하기로 한 1737년(영조 13) 당시 육진에 큰 기근이 들어 내수사 사내종들에게 공미를 거두기 어려운 형편이었을 뿐만아니라, 1만 석의 원곡으로는 함경도의 진대(賑貸)를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결국 원산교제창이 제구실을 하게 된 것은 1741년(영조 17) 경상도에서 13~14만 석의 곡물을 이전해오면서부터였다.

교제창이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도내 창고의 증설과 진자의 추가 확보가 시급하였다. 이에 1742년(영조 18) 감진어사 홍계희의 청에 따라 함흥과 이성에 운전교제창(雲田交濟倉)과 자외교제창(者外交濟倉)을 각각 설치하였다. 이로써 교제 3창 즉, 남관교제창이 완비되었다. 이후 북관 지역에도 남관과 마찬가지로 교제창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일었으나 곧바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1784년(정조 8) 함경감사 이명식(李命植)의 건의로 『북관교제곡절목(北關交濟穀節目)』이 작성되면서 북관의 교제곡 운영이 본격화되었다. 다만 북관의 교제고(交濟庫)는 운송의 문제를 고려해 창사를 새로 건립하는 대신, 각 읍의 해창(海倉)과 평창(平倉)을 교제고로 활용하였다.

[변천]
원산교제창을 시작으로 함흥과 이성에 교제창을 설치하고 부속 읍에 곡물을 나누어 배치함으로써 교제곡은 18세기 후반 들어 증가하였다. 1742년(영조 18)에 18만 9623석이던 것이 1759년(영조 35)에는 23만 9125석으로, 1763년(영조 39)에는 24만 석으로 늘어났다. 이렇게 진자곡이 상당량 확보되자 교제창에서는 다른 지역에 곡식을 이전해주기까지 하였다. 1762년(영조 38) 삼남 지방에 기근이 들자 함경도에 비축해 둔 곡식을 옮겨 주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때 함경도에서 분급한 곡식은 경상도에 3만 석, 전라도에 3만 석, 충청도에 5만 석으로 총 11만 석에 달하였다. 경상도의 곡식을 매번 이전해 가던 함경도에서 삼남에 진휼곡을 이전해 주는 상태가 되자, 영조는 교제창의 성과를 전국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에 1763년(영조 39)에는 삼남 지역에 제민창을 설립하도록 하였다.

한편 교제곡이 24만석으로 늘어나는 시점부터 비변사에서는 원곡의 절반을 교제 3창에 구치곡(久置穀)으로 보관해 두고, 나머지 절반은 운송의 번거로움을 덜어 준다는 명목으로 각 읍에서 산재곡(散在穀)으로 운영하게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도 교제 3창의 원곡은 비교적 충실히 유지되었다. 반면 각 읍에 분치된 교제곡은 제대로 징수되지 못하여 액수가 크게 줄었다. 진휼곡의 안정적인 확보와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두 가지 목표 속에서 교제곡은 이처럼 상이한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참고문헌]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만기요람(萬機要覽)』
■ 문용식, 『조선후기(朝鮮後期) 진정(賑政)과 환곡운영(還穀運營)』, 경인문화사, 2001.
■ 고승희, 「조선후기 함경도의 교제창(交濟倉) 운영과 진자공급책(賑資供給策)의 변화」, 『이화사학연구(梨花史學硏究)』 27 ,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사학연구소, 2000.
■ 정형지, 「남북교제창(南北交濟倉)의 설치(設置)와 운영(運營)」, 『오산전문대학 산업기술연구소보』4 , 오산대학 산업기술연구소, 1998.

■ [집필자] 최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