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1835년(헌종 즉위)에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묘를 동구릉 안으로 옮겨 그 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趙氏)와 합장한 능이다. 1830년(순조 30)에 처음 효명세자의 무덤이 조성되었을 때는 연경묘(延慶墓)라고 불렀는데, 그 위치는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인 의릉(懿陵)의 왼쪽 언덕이었다. 그 뒤 헌종이 즉위하여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호를 수릉이라 하였다. 1846년(헌종 12)에 풍수상 불길하다는 논의가 있어 양주 용마산 아래로 천장했다가, 1855년(철종 6)에 다시 풍수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동구릉 내 건원릉(健元陵) 좌측 언덕으로 천장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그 비 신정왕후가 죽자 합장하였고, 봉분도 하나만 만들었다. 효명세자는 대한제국 출범 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었다.
[조성 경위]
순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하던 효명세자는 1830년 창덕궁 희정당에서 승하하였다. 이에 창경궁 환경전(歡慶殿)에 빈궁(殯宮)을 차리고,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 경내에 유방(酉方)을 등지고 묘방(卯方)을 바라보는 방향, 즉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예장하였다. 세자의 지위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원(園)의 격식으로 무덤을 만들고 연경묘라 이름 하였다[『순조실록』 30년 7월 1일]. 그 뒤 순조가 승하하고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즉위하여 익종으로 추존하면서 연경묘도 격상시켜 수릉이라 하였다.
[조성 상황]
수릉의 현궁(玄宮)은 회격분(灰隔墳)으로 조성되었다. 능상은 봉분을 만들어 난간석을 두르고, 뒤쪽에 곡장(曲墻)을 설치했다. 봉분의 사방에는 양석과 호석 각 4개씩을 놓았으며, 봉분 상계(上階)에는 혼유석과 망주석 1쌍을 설치하고, 중계(中階)에는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 1쌍씩을, 하계(下階)에는 무인석과 마석 1쌍씩을 배치했다. 정자각은 정전(正殿)이 3칸, 배위청(拜位廳)이 2칸이며,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표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은 2칸이다.
[변천]
1846년(헌종 12)에 헌종은 수릉의 천장을 결정했고, 두 자전(慈殿)에게 품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새로운 산릉은 용마산 아래의 길지에 자리 잡았다. 그러나 1855년(철종 6)에 인릉(仁陵), 휘경원(徽慶園)과 더불어 택조(宅兆)가 이롭지 못하다는 의논이 있어 또다시 동구릉 내 건원릉 좌측 언덕에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방향, 즉 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천장했다. 1890년(고종 27)에 신정왕후가 승하하자 합장하고 단분으로 조성했다. 당시 표석을 다시 썼기 때문에 비각을 고쳐야 함에 따라 그 규모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종전처럼 2칸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표석은 고종이 직접 짓고 썼다. 1891년(고종 28)에는 표석을 다듬어 광택을 냈으며, 1894년(고종 31)에는 사초(莎草)를 다시 입혔다. 1897년(광무 1) 7월에는 중건청(重建廳)을 설치하여 정자각과 재실, 석물 등을 모두 개수하였다. 그해 10월에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선포한 고종은 1899년에는 역대 왕들을 추숭하였다. 익종으로 추숭된 효명세자는 그에 따라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고종실록』 36년 12월 7일]. 이로 인해 1900년(광무 4)에는 표석을 갈아 내용을 고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관련 사항]
수릉은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9년에는 다른 조선 왕릉들과 더불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