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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정조의 후궁인 가순궁(嘉順宮) 수빈박씨는 순조의 생모이다. 1787년(정조 11)에 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822년(순조 22) 12월 26일에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원호(園號)를 ‘휘경’, 시호를 현목(顯穆)으로 정하고,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해당하는 양주 배봉산(拜峯山) 아래 옛 영우원(永祐園) 자리 왼쪽에 장사하였다[『순조실록』 23년 2월 3일].
그 뒤 1855년(철종 6)에 순조의 능인 인릉(仁陵)을 천릉하면서 수릉과 휘경원이 풍수상 좋지 않음이 거론되어 휘경원을 순강원(順康園) 오른쪽으로 옮겼고, 1863년(철종 14)에는 다시 광릉(光陵) 근처로 천장하였다.
[조성 경위]
1822년(순조 22) 12월 26일에 수빈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사흘 뒤인 12월 29일에 원호를 ‘휘경’으로 정하였다. 그 뒤 관상감에 명하여 묘 자리를 물색했는데, 화성(華城)의 옛 향교 터는 좌향이 맞지 않았다. 그밖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禧陵) 터, 양주 배봉산, 공덕리(孔德里) 등이 후보지로 거론되었는데, 민가가 많은 공덕리 대신 민가의 수효가 많지 않은 배봉산으로 결정하였다[『순조실록』 23년 1월 19일].
[조성 상황]
1823년(순종 23) 초장시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인 영우원이 있던 자리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는데, 1789년(정조 13)에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개칭하고 천장하면서 묻어 둔 석물을 다듬어 사용하였다. 그 뒤 1855년(철종 6)에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仁嬪金氏)의 묘인 순강원 오른쪽으로 옮겼다.
1차 천봉할 때에는 영의정(領議政) 김좌근(金左根)이 도제조(都提調)를 맡았다. 표석은 구 표석을 갈아 천봉 내용을 적었으며, 석물과 정자각은 새로 제작하지 않고 옮겨 설치했다. 1863년(철종 14)에 터가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2차로 세조의 능인 광릉 인근의 양주 달마동에 천봉하여 임좌병향으로 예장하였다. 총호사(摠護使)는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김좌근이 맡았고, 1차 천봉 때와 마찬가지로 석물과 정자각을 새로 짓지 않고 옮겨 사용했다.
현재 휘경원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이 있으며 문인석, 마석, 망주석이 각각 한 쌍씩, 양석과 호석이 2쌍씩, 혼유석과 장명등이 있으며 곡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변천]
고종대에 세자나 세손의 묘를 ‘원(園)’으로 승격시키고, 그에 속한 관원의 명칭을 정비할 때 그중 휘경원의 영(令)과 참봉(參奉)은 모두 수봉관으로 삼되, 한 자리는 참하(參下)의 문관을 차출하여 30삭이 차면 6품직으로 올리며, 한 자리는 종친부에서 30세 이상인 선파인(璿派人)을 선임하여 순차에 따라 다른 벼슬에 승급시키도록 하였다[『고종실록』 7년 12월 13일]. 한편 1901년(광무 5) 수빈박씨를 수비(綏妃)로 높였다[『고종실록』 38년 10월 11일].
[관련 사항]
1907년(융희 1)에 헌종의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가 세상을 떠나자, 그 묘를 수빈박씨의 묘가 있던 휘경원 경내 서쪽 기슭에 손좌(巽坐)로 정하였다[『고종실록』 44년 6월 10일]. 이때 묘의 명칭도 수빈박씨의 원호(園號)를 그대로 사용하여 휘경원이라 불렀다. 경빈김씨의 묘는 1949년 7월 6일에, 오늘날의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의 귀인, 숙의 묘역으로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