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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개천도감은 1411년(태종 11) 윤12월에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12년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약 한 달 동안 한성(漢城) 내 하천의 물길을 정비하고 다리를 조성하는 역사를 담당했다. 이 하천은 지금의 청계천(淸溪川)이다. 1412년 2월 물길의 정비를 마친 후 개천도감은 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전환되어 시전 등의 행랑을 건설하는 작업을 맡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개천(開川)’은 인공적으로 하천의 물길을 만든다는 뜻이다. 지금의 청계천은 원래 도성에 있는 하천이었으나 자연적으로 물길이 정비된 것은 아니었다. 1405년(태종 5) 한성으로 재천도한 이후, 이듬해인 1406년에 일부 구간을 준설하고 도로를 닦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약간 수리한 정도였다.
본격적인 개천은 1411년 윤12월 14일 개거도감(開渠都監)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개거도감은 1412년 1월 이전에 ‘개천도감’으로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개천 사업은 행랑 건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1411년 윤12월 개천도감 설치 하루 전인 13일, 행랑에 사용할 강원도의 재목을 베었고 개천이 완료된 이후 개천도감이 바로 행랑조성도감으로 전환되었다. 개천은 행랑 건설을 위해 토대를 정비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태종대 행랑을 건설한 이유는 상업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태종은 상인층이 소유한 부를 드러내 국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화폐의 기능을 대신하던 추포(麤布)를 압수하고 지폐[楮貨]를 통용하려 했다. 그러나 상인층은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이를 피하기 위해 한성과 개경에 집을 지어 놓고 이리저리 추포를 감추곤 하였다. 또한 한성 내 시장이 정비되어 있지 않아 도둑질 등의 범죄가 빈번하게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에 태종은 시전 행랑 건설을 추진하고, 그에 앞서 한성 안을 가로지르는 하천을 정비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개천도감이 윤12월에 처음 설치되었던 당시에는 성산군(星山君) 이직(李稷), 공조(工曹) 판서(判書) 박자청(朴子靑),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응(李膺) 등 3명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1월 공사 시작 전에는 남성군(南城君) 홍서(洪恕), 화성군(花城君) 장사정(張思靖), 희천군(熙川君) 김우(金宇), 총제(摠制) 김중보(金重寶)·유습(柳濕)·이지실(李之實)·김만수(金萬壽)·유은지(柳殷之)·이안우(李安愚)·황녹(黃祿) 등 10명을 추가로 제조로 삼았다. 제조 아래에는 사(使)와 판관(判官)이 있었는데, 이 역시 1월에 33명을 증원하였다.
공사를 위해서는 충청·전라·경상도의 3도에서 5만 2천 8백 명의 군인을 동원하였다. 세종대 집계한 한성부 인구가 10만 명 수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한 인원을 동원한 것이었다.
개천도감에서는 물길을 정비하며 서부 도성에서 종묘동 입구까지는 돌로, 종묘동 입구부터 동부는 나무로 축대를 쌓았으며 다리를 건설하였다. 한성 서쪽의 장의동(藏義洞) 어귀부터 종묘동 어귀 구간의 하천과, 창덕궁 북쪽에 위치했던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의 문 앞 하천은 모두 돌로 축대를 쌓았다. 한편 종묘동 어귀부터 동쪽으로 수구문(水口門), 즉 광희문(光熙門) 구간은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었다. 비교적 지대가 높고 인구가 조밀한 도성의 서부 지역은 돌로 축대를 만들고, 지대가 낮고 인구 밀도가 낮았던 동부 지역은 나무로 축대를 만든 셈이다.
또한 원래 토교(土橋)로 건설되었던 다리들을 석교로 개축하였다. 대광통교(大廣通橋), 소광통교(小廣通橋), 혜정교(惠政橋),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와 신화방(神化坊) 동구(洞口) 등의 다리 등이 이때 석교로 건설되었다. 대광통교의 경우에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 능인 정릉(貞陵)을 이전하면서 정릉의 석물을 옮겨 사용하기도 하였다.
[변천]
1412년 2월 개천 공사를 마친 후 도감의 조직은 그대로 행랑조성도감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역군으로 활용한 충청·전라·경상도 3도의 군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