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내용]
졸곡은 ‘곡을 그친다.’는 말이다. 이때부터 조석의 사이에 슬픔이 이르러도 곡을 하지 않으며, 아침과 저녁으로만 하게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초종(初終) 이래로 슬픔이 그만큼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졸곡제는 상제(喪祭)에서 길제(吉祭)로 바뀌는 분기점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여러 제도가 만들어졌다.
사대부가 삼우제(三虞祭) 뒤 졸곡제를 지내는 반면 왕은 칠우제(七虞祭) 뒤에 졸곡제를 행하였다. 제사 절차는 우제와 거의 같다. 다만, 축판(祝版)의 위치와 독축(讀祝) 자리의 차이가 있다. 축판은 영좌(靈座)의 왼쪽에 올리던 것이 오른쪽으로 바뀌며, 축문을 읽는 위치도 대축(大祝)이 영좌의 왼쪽으로 가서 서향하던 것을 오른쪽으로 가서 동향하는 것으로 바뀐다.
졸곡제는 상복을 입은 자들이 점차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전환점이요 출발점으로서의 상례 절차라고 하겠다. 그리하여 졸곡제 뒤에 왕은 익선관(翼善冠)에 백포(白袍)·흑각대(黑角帶)·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고, 백관(百官)은 백의(白衣)에 오모(烏帽)·각대(角帶)를 착용하였으며, 군사들도 변복(變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