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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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北人)

서지사항
항목명북인(北人)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동인(東人), 서인(西人)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사색당파 중 하나로 동인 내에서 서인에 대한 대응을 둘러싸고 분립이 일어났을 때, 서인에 대한 정책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한 당파.

[개설]
북인(北人)은 선조 후반 본격적으로 당파를 형성하고, 광해군대에 집권 세력이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였다. 1575년(선조 8) 최초의 분당(分黨)인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분당이 시작되고, 1588년경부터 동인 내에서 남인과 북인의 분열 조짐이 일어났다. 본격적인 남북 분당은 1589년(선조 22) 정여립 역모 사건에서 발단한 기축옥사(己丑獄事)였다. 기축옥사로 동인의 영수인 유성룡이 같은 동인인 이발을 구원하지 않은 것과, 동인 내에서 서인에 대한 공격을 둘러싸고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일어나면서 북인과 남인의 분립이 이루어졌다. 남인은 주로 온건한 입장을, 북인은 강경한 입장을 취했는데 기축옥사에서 이발, 최영경 등 북인의 피해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북인의 주축은 조식의 학문을 계승한 남명학파와 서경덕의 학문을 계승한 화담학파였으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발,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 유영경, 김신국, 남이공, 허균, 유몽인 등이 있다. 북인은 서인이나 남인에 비해 성리학의 의리론이나 명분론에 집착하는 경향이 약했으며, 성리학 이외에 양명학, 노장사상 등을 절충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북인은 동인의 분열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동인 내에서 유성룡과 우성전 등을 지지하는 세력은 남인, 이발·이산해·정인홍을 지지하는 세력은 북인이 되었다. 북인이라 칭하게 된 이유는 『당의통략』에 의하면 영수인 이발이 북악산 기슭에 거처한 데 기인하며, 북인의 주요 인물인 이산해 또한 한강 이북에 있었기 때문이다. 1588년의 실록 기사에는 "이때에 조정에 이미 남인·북인의 설이 있어, 서인을 편파적으로 대하며 배척하는 것을 북인이라 하고 동인과 서인을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남인이라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1년 8월 1일]고 하여 북인이 서인에 대해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했음을 알 수가 있다. 1589년 기축옥사는 남인과 북인의 분립을 가속시켰는데, 남인은 유성룡을 중심으로, 북인은 정인홍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기축옥사에 연루된 북인으로는 이발, 이길, 정언신, 정언지, 조인후 등이 있었다.

남인과 북인 분열의 핵심 요인은 유성룡의 처신이었다[『선조실록』 32년 1월 18일] [『선조실록』 32년 7월 21일]. 또한 북인은 다른 당파에 비해 자체 내에서도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대북과 소북, 대북 내 골북과 육북의 분열, 소북 내의 유당(柳黨)과 남당(南黨)의 분열이 그것이다. 북인의 분열이 심하게 일어난 것은 남인의 주축을 이룬 퇴계학파에 비해, 남명학파와 화담학파의 학자들이 느슨하게 당파를 이루어 학연적인 결속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북인의 핵심 인사의 면모를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이산해(李山海)는 서경덕의 문인인 이지함의 조카이자 제자였으며, 정인홍(鄭仁弘)과 최영경(崔永慶)은 조식(曺植)의 핵심 제자였다. 이산해와 정인홍 외에는 대부분 이들과 혈연, 지연, 인척 관계로 연결되거나, 이들에 의해 관직에 진출한 인물이었다. 학연적으로 약한 결속력은 북인 내의 분열을 가속화시켜 대북과 소북, 대북 내의 육북과 골북의 분열, 소북 내의 청북과 탁북의 분열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북인의 중심인물을 계파별로 분류하면, 이산해 계열로는 이홍로(李弘老), 이경전(李慶全), 임국로(任國老), 이이첨 (李爾瞻)등이, 정인홍 계열로는 문경호(文景虎), 문홍도(文弘道), 박여량(朴汝樑), 오여은(吳汝隱) 등이, 김신국(金藎國)과 남이공(南以恭) 계열로는 박이장(朴而章), 박이서(朴彛敍) 등이, 유영경 계열로는 최천건(崔天健), 김대래(金大來), 이효원(李效元) 등이 있었다. 선조와 광해군의 척신이면서 북인으로 활약한 인물로는 기자헌(奇自獻), 유영경, 박승종(朴承宗), 유희분(柳希奮), 이이첨, 정창연(鄭昌衍) 등을 들 수가 있다.

[변천]
북인은 선조 후반 남인, 서인과 함께 붕당정치의 주요 당파를 형성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이 정국을 장악한 데에는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과 영남에서 정인홍 등이 의병을 일으켜 구국에 앞장섰던 일을 바탕으로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북인 사이에서도 정치적인 이견으로 대립이 생겼고, 결정적으로 세자 책봉 문제에서 견해 차이를 드러내면서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으로 갈라졌다. 대북파는 정인홍, 이이첨을 중심으로 하였고 소북파는 유영경을 중심으로 하였다. 대북파 내에서도 골북·육북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인홍, 이이첨 등이 중심이 된 대북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북인들은 광해군의 왕통에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하고,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을 문묘에서 출향(黜享)하고자 했던 회퇴변척(晦退辨斥)이 사류들의 반발을 샀다. 1613년 영창대군의 살해에 이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기까지 한 것은 반대 정파인 서인과 남인을 결집시키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북인에 대해서는 도덕과 의리의 문제를 들어 패륜 정권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북인의 정치적, 사상적 영향으로 인해 광해군대 정국 운영에서 성리학적 의리론이나 명분론이 상대적으로 퇴조하고 다양한 사회·경제 정책이 수립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외교 정책에서는 1618년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 중립 외교를 지향한 광해군과는 달리 서인과 남인은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을 벗어나지 못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후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의 대다수가 처형되거나 숙청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당파의 명맥이 끊어졌다. 그러나 대북에 비해 온건했던 소북은 김신국, 남이공 등이 인조반정 이후에도 계속 실무 관료로서 활약하였다. 『당의통략』에서, "소북은 능히 자립할 수가 없어서 서인과 남인에게 많이 투항하여 붙었다."고 한 것이나, "북인은 오직 남이웅(南以雄) 뿐이었는데, 일찍이 이조 판서가 되어 임용 대상자를 천거하면서 서인, 남인, 북인을 나란히 등용하여 삼색도화(三色桃花)라고 이름하였다."는 기록은 이러한 시대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상적으로 북인의 학맥은 소북에서 근기남인 세력으로 이어지면서, 조선후기 실학 사상의 형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북인은 조선후기 내내 정치·사상계의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였으며,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잠시 등용되었을 뿐이다. 1870년대 북인 가문의 족보를 정리한 『북보(北譜)』에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전주유씨, 밀양박씨, 의령남씨, 풍천임씨 등 북인으로 활약한 주요 가문과 인물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당의통략(黨議通略)』
■ 강주진, 『이조당쟁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1.
■ 성낙훈, 『한국당쟁사』, 한국문화사대 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5.
■ 신병주,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 신병주, 『조선중, 후기 지성사 연구』, 새문사, 2007.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1·2, 동방미디어, 2000.
■ 한명기,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 구덕회, 「선조대 후반(1594~1608) 정치체제의 재편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론』20, 1988.
■ 오이환, 「광해군 초기의 정인홍」, 『퇴계학과 한국문화』41, 2007.
■ 오이환, 「대북정권 시기의 정인홍」, 『한국사상사학』30, 2008.
■ 한명기, 「광해군대 대북세력과 정국의 동향」, 『한국사론』20, 1988.

■ [집필자] 신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