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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삼법사(三法司)는 형조·사헌부·한성부 또는 형조·한성부·의금부를 일컫는 말이다. 법사(法司)는 사법권을 가진 기관이라는 뜻으로, 사법·행정의 감독 기관이며 복심재판기관인 형조, 언론·결송 기관인 사헌부, 추국을 담당한 특별재판 기관으로서의 의금부, 노비에 관한 소송을 맡은 장례원, 토지·가옥에 관한 소송을 처리하는 재판 기관인 한성부 등이 있었다. 이 관청 가운데 그 시대의 중요성에 따라 삼법사의 구성이 달라졌다.
『사헌부장고(司憲府掌攷)』 금제(禁制)조에서는 "(사)헌부, 한성부, 형조를 삼사라고 하는데 모두 출금아문(出禁衙門)이다. 그러나 헌부가 상급 관사이기 때문에 헌부가 잡은 바는 형조, 한성부가 다시 잡을 수 없으나 헌부는 형조, 한성부를 막론하고 잡은 바를 역시 추치할 수 있다. 그러나 금한 바를 단속하여 취초한 후에는 형조에 이송하여 조율하고 결죄한다."고 하여 삼사의 위계와 역할을 밝히고 있다.
한성부는 소송 전담 아문은 아니었으나 서울의 전토, 부채, 검시 등에 관한 전반적인 일을 관할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관련된 소송도 아울러 관장해야 했다. 그러나 한성부는 형벌을 행사할 수 있는 용형(用刑)아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형추해야 할 일은 형조로 이관되었다.
사헌부가 직접 청리를 담당하지는 않았지만 잘못된 판결에 대한 진정이 접수되면 이를 심사하여 다른 관사에 이관하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소송에서 패소했더라도 사정이 억울하다면 사헌부에 정소할 수 있었고 이는 3번 승소한 사건에 더 이상 소송을 제기할 수 없는 삼도득결의 횟수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 사헌부는 검칙(檢勅)의 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형조, 한성부, 장례원의 판결 횟수 및 대중소사 판결 날짜 등을 사헌부에 보고해야 했고 뇌물로 인해 판결이 좌우되는지를 살피는 것도 사헌부의 임무였다. 즉 사헌부는 단독으로 사송(청송)하는 아문은 아니었지만 형조, 장례원, 한성부의 판결이 원활히 이루어지고 공정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독하였고, 다른 청송아문과 더불어 사건을 조사할 수 있었다.
의금부는 조선 왕조의 왕권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데 기여한 조선의 특별 사법재판 기구였다. 의금부는 국왕 시위와 사찰의 임무를 담당했고 왕권에 밀착된 조옥(詔獄)이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반대파 제거를 위한 정치 재판소였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사회의 유교 윤리를 옹호하기 위한 재판 기구였으며 각종 미해결이나 중대 사건의 최종 판결 기관이기도 했다. 대외관계 범죄의 전담 기관, 관료의 직무상 범죄를 취급하는 한편 양반 관료의 우대를 위한 양반 재판소로 왕권의 확립과 전제화를 촉진시키고 조선 왕조의 사회 질서를 유지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