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문중은 자손들이 조상의 제사 및 자체 결속력 강화를 위하여 구성한 조직으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 일반화되고 그 사회적 중요성도 강화되었다. 종중(宗中)이라고도 하며 자손이 포함되는 범위에 따라 대문중(大門中)·파문중(派門中)·소문중(小門中)으로 구분 짓기도 한다. 문중 세력은 지역 사회에서 비슷한 사회적 명성을 지닌 다른 문중들과 연대·교류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립·갈등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문중은 자손이 포함되는 범위에 따라 대문중·파문중·소문중으로 나뉜다. 대문중은 동성동본의 혈족인 모든 사람을 포함하며, 파문중은 시조(始祖) 이후에 가문을 다시 일으킨 중시조(中始祖)를 중심으로 하고, 소문중은 일정 지역에 제일 먼저 정착한 조상인 입향조(入鄕祖)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후기 이래 일반화된 대종 혹은 대문중은 시조 이래 동성동본의 혈족인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이 고관대작이나 유명한 학자로서 이름을 널리 알린 조상, 즉 파조(派祖)를 기점으로 형성한 ‘파(派)’가 문중의 중심 역할을 한다. 형제 중 한 사람이 유명하여 한 파의 파시조가 되면 그 형제들은 이것과 다른 파의 시조들이 되는 것이다. 파조는 문중의 중심인물로 파명(派名)은 파시조의 시호, 호, 관직, 후손 집거지 등을 상징화하여 예컨대 ‘문정공파’, ‘송암파’, ‘승지공파’, ‘청양파’ 등으로 부른다.
문중의 범위와 기능은 조상 숭배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선조 추숭과 현창(顯彰), 각종 유적의 중수와 복원, 족보의 간행, 족계의 활성화, 문집 간행 등을 통해 문중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나아가 대외적인 위세를 높일 수 있었다. 특히, 1년에 한 번 행하는 묘제(墓祭)는 각 집에서 기제(忌祭)를 지내지 않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행함으로써 공동 조상의 자손임을 재강조하는 문중 관할하의 가장 중심적 행사이다. 이를 통하여 구성원들은 강한 소속감을 느끼게 되며, 문중이 집단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게 된다.
대외적으로 문중을 대표하는 것은 종손(宗孫)과 문장(門長)이라고 볼 수 있다. 문중의 중심은 직계 장손 집안의 호주인 종손이지만, 연령·항렬·학문·인품으로 보아서 대내외적으로 대표 자격인 문장을 선출한다.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 가운데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을 뽑거나, 나이가 많은 어른 중 학식과 덕망으로 여러 사람의 숭앙을 받고 있는 사람을 뽑기도 한다. 문장은 종신직이며 일단 선출되면 종손과 함께 대내외적인 문중 일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간다.
종가(宗家)는 문중의 얼굴이며 봉제사(奉祭祀)뿐만 아니라 접빈객(接賓客)의 구실도 한다. 이러한 기능 때문에, 종가는 문중의 특별한 지원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문중 단위의 행사는 종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선조가 서원에 배향되거나 불천위(不遷位)가 되는 경우, 종가는 그 지위가 크게 승격된다.
문중은 이러한 봉제사와 문중 조직, 공동 재산을 관리하기 위하여 종계(宗契)를 구성하였다. 종계는 족계(族契)·종약(宗約)·화수계(花樹契)로도 불리며 씨족 성원 간에 친목을 도모하거나 조상에 대한 제사 및 그 분묘의 관리 등을 담당하였다. 종계 관련 문서로 족계 자료와 함께 좌목(座目)류 자료, 공동 재산의 관리를 위한 별도의 규약이나 치부책(置簿冊) 등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이는 문중 조직의 형성과 발전 및 결속력을 파악하는 데 유용한 자료이며, 임원의 선출이나 의무, 구성원의 자격, 공동 재산의 관리나 운영, 범칙자에 대한 처벌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문중의 종인(宗人)이 조직한 계를 종회(宗會)라고 하는데, 종인은 연 1회 내지 2회 회의를 가졌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기록된 문중의 용례는 1395년(태조 4)에 박신(朴信) 등의 상언에서 나타난다. 박신은 노비 관련 쟁송으로 골육 간에 서로 힐난하며, 문중이 갈라지고 집안이 나뉜다고 하였다[『태조실록』 4년 11월 28일]. 1601년(선조 34)에는 정유재란 때 왜군과 싸우다 자녀들과 함께 죽은 충절인(忠節人)으로 후사가 없던 안음현감 곽준(郭䞭)에게 문중에서 사촌의 손자로 하여금 곽준의 후사가 되게 하여 곽준의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4년 10월 25일]. 1724년(영조 즉위) 9월 기사에서는 신역(身役)을 인족(隣族)이나 혹은 백골(白骨)에게까지 지우고 심한 경우에는 한 사람이 온 문중의 역(役)을 겸한다고 하였다[『영조실록』 즉위년 9월 22일].
이처럼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문중이 가문을 의미하는 용어로만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문중 활동이나 조직 구성 등에 관한 자료는 찾기 힘들다. 다만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문중이 결속체로서 사회적 활동을 하는 사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예컨대 1675년(숙종 1) 호군 김수홍(金壽弘)이 관문서와 조부 김상용(金尙容)의 축문에 청나라 ‘강희(康熙)’ 연호를 쓰자 온 문중이 몹시 놀라 ‘가문의 적’이라고 하였다[『숙종실록』 1년 4월 9일].
문중의 범위와 기능은 조상 숭배 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조상의 추숭과 현창, 각종 유적의 중수와 복원, 족보의 간행, 족계의 활성화, 문집 간행 등이 모두 문중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과정에서 문중 구성원들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대외적인 위세를 높일 수 있었다. 문중의 조상 및 저명 인물에 대한 의례는 문중 구성원들이 같은 조상의 자손임을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며, 문중 세력은 지방관과 협조하면서 향촌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비슷한 사회적 명성을 지닌 다른 문중들과 연대·교류하기도 하였다.
이들 문중을 형성한 저명 가문들은 향촌 사회 변화 속에서 지배력을 보장받기 위한 방편으로, 혹은 자체 결속력을 강화하고자 17세기 초·중엽에 족계, 혹은 종계로 불리는 문중 조직을 만들어 제사와 선영(先塋) 관리, 현조(顯祖)에 대한 추숭·현양(顯揚)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종가·선영·재실·서당 등 여러 족적 기구들과 상징적 기반들을 만들고, 문중 소유의 토지인 종토(宗土)나 문중 제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인 위토(位土) 등의 사회·경제적 토대를 구비하였다. 나아가 종중의 조직력과 위세를 배경으로 배출 인물의 추숭, 서원·사우 건립, 파보·족보·문집 간행 등의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참고문헌]
■ 김택규, 『한국 가족 제도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0.
■ 이해준, 「조선 후기 ‘문중화’ 경향과 친족 조직의 변질」, 『역사와현실』48, 2003.
■ 이해준, 「조선 후기 문중 활동의 사회사적 배경」, 『동양학』23, 1993.
■ 지두환, 「조선 전기의 종법 제도 이해 과정」, 『태동고전연구』1, 1984.
■ 지두환, 「조선 초기 주자가례의 이해 과정: 국상의례를 중심으로」, 『한국사론』8, 1982.
■ 최재석, 「조선시대의 족보와 동족 조직」, 『역사학보』81,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