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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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결(手決)

서지사항
항목명수결(手決)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서명(署名), 수례(手例), 수압(手押)
관련어각압(刻押), 교압(校押), 부인도서(婦人圖書), 서압(署押), 수장(手掌), 수촌(手寸), 압(押), 인장(印章), 착명(着名), 착압(着押), 함(啣), 화압(花押), 화압(畵押)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자신의 직함이나 이름 밑에 도장 대신 자필로 쓰는 서명(署名).

[개설]
수결(手決)은 조선후기에 서명을 지칭하는 용어로, 조선전기 문헌에서는 ‘손수 처결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어떤 사안에 대하여 최종 결정을 내리거나 처결을 하는 것은 문서 작성의 최종 종결 행위이므로 마지막 단계에서 문서에 결재한다는 뜻으로 수결의 의미가 변이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문헌 기록을 보면 시대에 따라서 수결을 지칭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고려사』에 착명서(着名署)·착서(着署)·초압(草押) 등의 용어가 보이고, 조선시대에는 서명(署名)·착명(着名)·착압(着押)·수례(手例)·수결·화압(花押) 등이 문헌 기록에 전한다. 수결은 착명과 착압의 두 종류가 있었다. 착명은 이름 글자를 변형하여 만든 수결이고, 착압은 별다른 글자를 변형하여 만든 수결이다. 서명은 착명과 같은 표현이고, 수결·수례·화압 등은 모두 착압을 가리킨다.

착명을 만들 때에는 이름 글자 중에서 다른 사람과의 변별력이 떨어지는 성(姓)과 항렬자를 제외하는 경우가 많았다. 착(着)은 ‘두다[置]’의 뜻이 있어서 한글 문헌에는 수결하는 행위를 ‘일홈 두다’로 표현하는데, ‘일홈’은 이름[名]을 가리키고 ‘두다’는 착을 풀이한 말이다. 착명은 개화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착압은 이름 글자와 달리 본인의 좌우명이나 상서롭고 좋은 글자로 만들었는데 일심(一心)·정(正)·의(宜)·인(忍)·무사(無私)·진(盡) 등이 대표적인 바탕 글자였다.

수결은 미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길상을 도안으로 만들기도 하였지만,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본인의 이름 글자나 좌우명 등 문자를 기본 바탕으로 만들었다. 서명의 바탕이 되는 문자를 가장 아름다운 모양으로 변형하여 만든 것인데, 여기에는 문자의 추상적 예술성이 한 번 더 추상화되는 지극히 디자인적인 요소가 발현된다.

글자체는 초서체를 많이 사용하였다. 초서는 필획의 운필이 빨리 이루어지므로 다른 사람이 같은 글자를 쓰더라도 모방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전통적 의미의 수결은 이름 글자나 좌우명의 초서체를 바탕으로 해서 변형한 것이 특히 많았다. 사용의 편리함과 위조 방지 기능, 미적 아름다움을 동시에 추구한 것이다.

왕의 경우는 어압(御押)으로 불리는 수결을 사용하였다. 왕이 등극하면 의정부 당상, 육조 참판 이상, 홍문관과 예문관의 당상관들이 모여서 국왕의 어압을 의논하여 정하였다. 효종은 정(正) 자, 현종은 입(立) 자, 숙종은 수(守) 자로 어압을 만들었다. 반면 천인이더라도 글을 읽고 쓸 줄 알면 수결을 할 수 있었다. 조선중기까지도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천인의 수결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동그라미와 같은 모양으로 수결을 흉내 내기도 하였고, 양반의 신분이더라도 병석에 누운 경우처럼 글을 쓰기가 모호하여 수결을 하지 못할 때는 수촌(手寸)을 하기도 하였다.

수결을 착명과 착압으로 나누어 사용한 것은 문서 작성의 예식(禮式) 때문이다. 이름 글자를 변형하여 만든 착명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올리는 문서나 상대방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정중한 문서에만 사용하였다.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계(啓)와 같은 공문서, 예의를 갖추어 보내는 간찰과 같은 사문서에는 착명을 하였다. 착명을 할 경우에는 착명할 곳 위에 성을 기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착압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문서를 내릴 때 사용하였다. 공문서로는 관(關)이나 첩(帖)에, 사문서로는 패지(牌旨) 등에 착압하였고, 성을 쓰지 않고 착압만 하여 권위를 표현하였다.

착명과 착압을 모두 하는 문서도 있었다. 첩정(牒呈)과 같이 하급 관청에서 상급 관청에 보고할 때 사용하는 공문서가 대표적이다. 분재기(分財記)·명문(明文) 따위의 문서에도 착명과 착압을 모두 하였는데, 거래나 계약처럼 더욱 철저한 신표(信標)의 기능이 요구되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수결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배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천민들은 매매 문서나 소송 문서 등을 작성할 때 제대로 된 수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결을 대신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실제 문서에 사용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수촌·수장(手掌)·부인(婦人) 도서(圖書)·각압(刻押)이 있다.

수촌은 손가락을 문서에 대고 그리는 서명 방식이다. 손가락의 두께, 마디 길이 등으로 개인의 특징을 구별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손가락의 실제 크기와 동일하게 그렸으나, 후기로 갈수록 대강 모양만 흉내 내는 경우가 많았다. 수장은 손바닥을 문서에 대고 그리는 서명 방식으로 주로 여성이 많이 사용하였다. 부인 도서는 양반집 여성들이 사용하던 서명 방식으로 검정색 먹물을 묻혀서 문서에 찍었다. 도서의 인문(印文)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나 조선전기에는 부인의 관향과 성씨를 썼고, 조선후기에는 남편의 이름과 본인의 성씨를 썼다.

각압은 서명을 나무 등에 새겨서 도장처럼 사용한 것이다. 관청의 공문서 가운데 호적과 같이 다량으로 생산되는 문서에 결재할 때 각압을 사용하였다. 각압은 중국 원나라에서 많이 사용하였다. 모필(毛筆)을 사용할 줄 모르던 색목인(色目人) 관리들이 손쉽게 공문서에 결재할 수 있도록 서명을 새겨서 찍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고려에 전해져 조선말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변천]
조선중기 이후 착명과 착압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사용하던 것이 차츰 흐트러지기 시작하였다. 이는 착명과 착압이 형태적으로 착종(錯綜)되는 시기와 거의 맞물려 있다. 그래서 조선후기 이후 착명과 착압은 형태만으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형태의 착종 현상은 용어에서도 나타나서 조선후기 문헌 가운데 착명과 착압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도 간혹 발견된다.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들이 수결을 흉내 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형태적으로는 더 이상 위조 방지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을 때 일본식 도장 문화가 유입되었다. 갑오개혁 이후부터 전통적 의미의 서명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고, 이후 한동안 도장 문화가 우리 사회의 결재 방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의의]
서명은 예제체식(禮制體式)에 따라 두 종류로 분화하였다. 상급자의 서명 방식은 착압이었으며, 하급자의 서명 방식은 착명이었다. 법전에 규정된 착명·착압의 사용 방식과 문서 결재 방법에 따라 행정 문서 체제의 특징을 규명할 수 있다. 또한 초서체를 변형하여 만든 서명은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녀 문자 디자인의 요소로 활용 가치가 크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홍무예제(洪武禮制)』
■ 『남계집(南溪集)』
■ 김응현, 『한국의 미』 6, 중앙일보사, 1981.
■ 정병완, 『한국인의 수결』, 아세아문화사, 1987.
■ 박준호, 「수결(화압)의 개념에 대한 연구」, 『고문서연구』 20, 2002.
■ 박준호, 「한국 고문서의 서명 형식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3.
■ 조복연, 「한국의 고문서의 화압에 관한 연구」, 『규장각』 5, 1981.

■ [집필자] 박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