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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훈련대는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권유에 따라 조선 군부의 위촉을 받은 일본군 포병중좌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가 훈련하여 편성하였다. 훈련대의 편제, 훈련 체계 등은 모두 일본식 군제의 영향을 받았으며 훈련대는 조선의 왕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에까지 가담하였다. 결국 훈련대에 대한 반대 여론이 거세져 1985년 9월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이노우에 공사는 1894년 12월 22일 왕을 알현할 때, 군대를 소집하여 새로운 편제를 제정하기 전에 기존의 병정 중에서 장정을 뽑아 훈련대를 조직하여 당분간 근위병에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더불어 군무아문 고문관 구스노세를 만나 군사상의 자문을 받을 것과 훈련대 연습에도 친히 참관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이듬해인 1895년 1월 18일 구 군영 병정 중의 일부를 선발하여 훈련대를 편성하였다.
[조직 및 역할]
훈련대는 처음에 중앙의 2개 대대로 편성되었으며, 1895년 4월 27일 평양에 제3대대와 윤5월 16일 청주군에 제4대대의 설치를 왕에게 재가받았다. 그해 5월 16일에는 「훈련대 사관 양성소 관제」를 마련하였고[『고종실록』 32년 5월 16일], 같은 달 20일에는 훈련대 대원들의 월급을 정교 10원, 부교 9원, 참교 8원, 병졸 5원 50전, 제3·4·5·6훈련대 소속 병졸은 3원으로 확정하였다.
훈련대가 연대급 규모로 편제되는 것은 그해 7월 23일부터로, 훈련 제1대대, 제2대대로 훈련 제1연대를 편제하였다. 이때 훈련 제1연대 본부는 연대장(정령 혹 부령) 1명, 연대부관(정위) 1명, 연대 기수(참위) 1명, 무기주관(부위 혹 참위) 1명, 본부 하사 정교 1명, 부교 1명, 참교 1명 총 3명으로 구성하였다. 이 편제는 같은 날 시위대에도 적용되었다.
[변천]
근대식 군대인 훈련대는 군대 편제, 훈련 체계, 무기 체계 등에서 모두 일본식 군제의 영향을 받았고, 이와 관련되어 1895년 8월 20일 왕후 민씨를 살해하는 이른바 ‘을미사변’을 방조하게 되었다.
왕후 살해 이후에도 훈련대는 그대로 두었고 그들의 무력 동원에 의하여 왕은 연금 상태로 있게 되었다. 이어 8월 25일에는 대대와 중대급까지의 편제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훈련대는 을미사변의 여파로 반대 여론이 계속 확산되면서 부대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고, 그 위에 제2대대장으로서 훈련대를 지휘하였던 우범선 등이 처벌을 두려워하여 9월 12일 일본으로 도주하면서 와해되었다. 이어 9월 13일 칙령 제169호로 훈련대 폐지 칙령에 따라 혁파되었다. 그 후 신식군대는 9월 13일 칙령 제170호 「육군 편제 강령」으로 신설된 친위·진위대로 계승되었다[『고종실록』 32년 9월 1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구한국관보(舊韓國官報)』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 공사관 기록(1~28)』, 국사편찬위원회, 1986~2000.
■ 송병기 외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Ⅰ~Ⅸ)』, 국회도서관, 1970~1972.
■ 차문섭, 「구한말 육군무관학교 연구」, 『아세아연구』 16권 2호, 1973.
■ 차준회, 「한말 군제 개편에 대하여: 군대 해산에 이르는 과정」, 『역사학보』 22, 1964.
■ 황병무, 「일본이 시행한 군제 개혁과 경군: 갑오~을미년 개혁을 중심으로」, 『(육군사관학교)논문집』 5,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