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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문효세자는 1782년(정조 6) 9월에 정조와 의빈성씨(宜嬪成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784년(정조 8) 8월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정조 10) 5세의 나이에 병으로 창덕궁 별당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효창공원 자리인 고양 율목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44년 10월 9일에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 경내로 이장하였다.
[조성 경위]
1786년(정조 10) 5월 11일에 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문효(文孝)로 정하였다[『정조실록』 10년 5월 22일]. 묘의 위치는 명종의 능인 강릉(康陵)이나 예종의 능인 창릉(昌陵)의 국내(局內)가 거론되었지만, 거리가 가까운 고양 율목동으로 결정하였다.
묘호(廟號)는 문희(文禧), 묘호(墓號)는 효창(孝昌)으로 정하였으며[『정조실록』 10년 6월 20일], 윤7월 19일에 장사를 지냈다. 정조는 친히 비명(碑銘)과 정자각의 상량문을 지어 내렸다.
[조성 상황]
묘의 조성을 담당하는 묘소도감(墓所都監)의 도제조(都提調)는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명선(徐明善)이 맡았다. 당초 1752년(영조 28)에 조성한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를 참조하려 했으나, 정조는 굳이 치수를 정하지 말고 준비되어 있는 재료를 써서 검소하게 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 정자각의 크기도 의소묘보다 작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문효세자묘소도감의궤(文孝世子墓所都監儀軌)』에 기록된 석물과 정자각의 크기를 살펴보면, 의소묘에 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설은 곡장 안에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망주석을 배치하고, 장명등과 문인석, 마석(馬石)을 설치하였다. 정자각은 정전 3칸 전면에 배위청 2칸이 달려 있는 ‘정(丁)’ 자 모양으로 건립했으며, 비각과 신도비각을 별도로 설립하였다.
[변천]
1879년(고종 16)에는 세자와 세손의 묘에 전배하는 의절을 높이고, ‘묘(墓)’를 ‘원(園)’으로 격상시켰다. 그에 따라 효창묘도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고종실록』 7년 12월 10일].
일제강점기인 1944년 효창원을 서삼릉으로 옮겼는데 석물은 유지되었으나 정면에 배위청이 있었던 정자각이 일자형으로 변형되었다. 서삼릉으로 옮긴 뒤 원래 효창원 일대는 효창공원이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광복 후에는 이곳에 김구, 이동녕, 이봉창, 차이석, 윤봉길, 종성환, 안중근의 묘를 모셨다.
[관련 사항]
문효세자의 장례를 치른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아 세자의 생모인 의빈성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효창묘의 왼쪽 등성이에 안장하였다[『정조실록』 10년 9월 14일][『정조실록』 10년 11월 20일]. 의빈묘는 원래 효창원과의 거리가 100보가 채 되지 않는 가까운 위치에 조성되었다.
의빈묘의 상설로는 곡장, 혼유석,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표석, 제각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서삼릉으로 이장된 곳에는 ‘의빈창녕성씨지묘(宜嬪昌寧成氏之墓)’라고 쓰인 표석과 혼유석만 남아 있다. 효창원에서 동쪽으로 99보 떨어진 곳에는 순조의 후궁인 숙의박씨(淑儀朴氏)와 그 딸인 영온옹주(永溫翁主)의 묘가 있었다[『순조실록』 29년 4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