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통신원(通信院)

서지사항
항목명통신원(通信院)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광무개혁(光武改革)
하위어전보사(電報司), 우체사(郵遞司), 총판관방(總辦官房), 서무국(庶務局), 우무학당(郵務學堂), 전무학당(電務學堂), 총판(總辦), 국장(局長), 참서관(參書官), 기사(技師), 번역관(飜譯官), 번역관보(飜譯官補), 주사(主事), 회판(會辦)
관련어농상공부(農商工部) 통신국(通信局), 공무아문(工務衙門), 역체국(驛遞局), 전신국(電信局), 체신과(遞信課), 관선과(管船課), 우체지사(郵遞支社), 우무학도규칙(郵務學徒規則), 전무학도규칙(電務學徒規則), 칙임관(勅任官)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대한제국기에 우편·전신(電信)·전화·전기·선박과 육·해운 수송 등의 분야를 관장하던 기관.

[개설]
통신원은 1900년 전신·전화·체신·선박 등을 담당하던 농상공부(農商工部) 통신국을 독립시켜 설치한 관서이다. 통신 사업은 대한제국이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였으며 또한 성공한 분야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통신 사업은 대한제국기에 실시한 사업 중에 가장 성공적으로 진행된 사업이었다. 1894년(고종 31) 7월 갑오개혁 때 공무아문(工務衙門)이 설치되고 그 안에 역체국(驛遞局)과 전신국(電信局)을 두었다가 이듬해 3월 농상공부 산하에 통신국으로 단일화하였다. 통신국은 우편·전신·전화·체신·선박·해원(海員)·항로표지(航路標識)·수운 회사·수운 사업의 감독 등을 맡았다. 통신국에는 체신과(遞信課)와 관선과(管船課) 두 과를 두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체신 사업은 1895년 6월부터 서울과 인천을 필두로 각지에 우체사(郵遞司)와 우체지사(郵遞支社)를 설치하여 진행되었다. 반면 전신 사업의 경우에는 1896년 8월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전신 시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일본 세력이 퇴조하면서 전신 시설을 인수받았고 역시 각지에 전보사(電報司)가 설치되었다. 선박 관리 업무는 1899년 선세(船稅) 규칙이 만들어져 가능해졌다. 선박에 대한 정보를 봄·가을로 통신국에 보고하였고, 선박 적재 톤수에 따라 부과된 세금은 관선과로 납부하도록 규정되었다.

통신 사업의 확대와 함께 전화 가설, 전기 시설의 도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1900년 3월 통신원이 독립 기구로 발족하였다. 통신원 발족 당시 전국에 우체사가 38곳, 전보사 19곳, 임시 우체소 340곳 등이 있어 통신원은 정부 내의 가장 방대한 조직을 갖게 되었다.

[조직 및 역할]
통신원은 우편·전신·선박·해원 등에 관한 모든 사무를 관리하도록 규정되었다. 발족 당시 통신원은 총판관방(總辦官房)과 서무국으로 이루어졌다. 총판관방에는 비서과·문서과·회계과·번역과를 두었고, 서무국에는 체신과·관선과를 두었다. 직원은 총판 1명, 국장 1명, 참서관(參書官) 3명, 기사(技師) 1명, 번역관 1명, 번역관보 1명, 주사(主事) 10명이 정원이었다[『고종실록』 37년 3월 23일]. 총판은 칙임관으로 정부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고, 통신원 사무와 관련하여 법률·칙령의 제정과 폐지를 정부에 제의할 수 있었으며, 통신원령을 발령할 수 있었다. 정부대신과는 동급이었고 관찰사에게 훈령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농상공부 협판인 민상호(閔商鎬)가 통신원 총판을 겸임하였다. 통신원이 발족하자 그동안 농상공부 산하에 있던 전보사와 우체사가 이관되어 왔다.

1902년 10월에는 통신원 관제를 개편하여 서무국을 없애고 총판관방을 6과 체제로 개편하였다. 동시에 직원은 총판·회판(會辦) 1명, 참서관 5명, 기사 1명, 번역관 2명, 주사 15명으로 늘렸다.

한편 통신 업무와는 다소 이질적인 선세를 담당하는 관선과의 업무도 농상공부에서 이관되어 왔다. 농상공부 관선과에는 중앙 관서의 참서관 1명, 주사 2명 외에 지방에 주재하며 선세를 거두는 선세 위원도 포함되었다. 특히 선세 위원은 개항장, 연해 포구, 강변 도시와 도서 지방 등 모두 22곳에 파견되었다. 선세 위원은 선박의 세금을 징수하고 선박의 등록과 검사 업무를 집행하였다. 선세 업무는 통신원으로 이관된 후에도 더욱 확대되어 1900년 10월 당시 선세 위원은 전국 29개 지역에 파견되었다.

통신원은 우체사 12곳, 전보사 16곳을 증설하였고, 9곳에서 전화 사업을 하였다. 아울러 외국 우편과 교류하였고, ‘우무학도규칙(郵務學徒規則)’과 ‘전무학도규칙(電務學徒規則)’을 제정하여 우무학당(郵務學堂)과 전무학당(電務學堂)의 졸업생을 우체사와 전보사에 임용하였다. 소량이지만 우표의 인쇄, 엽서의 발행, 일본 우편국의 통신 주권 침해 저지 등 통신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다. 광무개혁의 여러 사업 중에 가장 성공적인 부분이 바로 통신 사업이었으며, 그 중심에 통신원이 있었다.

[변천]
일본은 한국 통신 기관의 침탈을 가장 중점적인 대한정책(對韓政策)의 하나로 추진해 왔다. 이에 따라 일본은 통신원의 재정 적자를 이유로 1905년(고종 42) 4월 1일 ‘한일통신기관협정’을 체결하였다. 통신원은 계속 두되, 우편·전신·전화 등의 통신 기관을 일본 정부에 관리를 위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결국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지속되었던 일본 제국정부의 침탈로 나타난 결과였다. 특히 통감부 설치 이후인 1905년 12월 대폭적인 직원 감축과 함께 토지 및 건물을 통감부 통신관리국에 양도하면서 통신원도 유명무실해졌다. 결국 1906년 7월에는 통신원 관제까지 폐지되었으며, 다시 선박 관련 업무는 농상공부로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 전기통신사 편찬위원회, 『한국 전기 통신 100년사(상)』, 체신부, 1985.
■ 김재승, 「대한제국 농상공부 통신국 관선과(管船課) 연구: 관선과의 조직과 인사를 중심으로」, 『국제무역연구』제9권 제1호, 2003.
■ 이영학, 「대한제국 시기의 기록 관리」, 『기록학연구』19, 2009.

■ [집필자] 은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