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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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統制營)

서지사항
항목명통제영(統制營)
용어구분용어용례
동의어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
관련어통제사(統制使), 한산도(閑山島), 수군(水軍), 군제(軍制), 전선(戰船), 이순신(李舜臣), 통영(統營), 거제도(巨濟島), 임진왜란(壬辰倭亂)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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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임진왜란 시인 1593년(선조 26) 충청·전라·경상도의 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統制使)가 있는 본진인 한산도의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을 줄여서 부르는 말.

[내용]
통제영은 1593년 경상남도 한산도에 최초로 설립된 이후 거제도로 옮겨졌다가 1604년(선조 37) 통영으로 옮겨졌다. 통제영은 1895년(고종 32)에 폐지될 때까지 조선 수군의 최고 통치 기관으로서 존재하였다.

통제영이 설치되었던 배경은 임진왜란 시 이순신 함대의 활약 때문이었다. 이순신 함대가 남해안에서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자 선조는 그를 중심으로 경상, 전라, 충청의 삼도 수군을 모두 총괄하는 통제영을 설치하고자 했으며, 이순신을 초대 통제사로 임명한 것이다[『숙종실록』 14년 6월 14일]. 광해군대에는 경상좌·우 수영에 통제영의 전선을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7월 14일].

통제영은 군사적인 일 이외에도 기존의 군영에서 중앙에 공물을 제공하던 관례를 이어갔다. 매년 단옷날이면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영에서 부채를 만들어 조정의 관원들에게 두루 선물하였듯이 통제영에서도 이어갔다[『정조실록』 17년 8월 29일]. 또한 시대가 흐를수록 통제영의 규율이나 관리도 유명무실해졌다. 숙종대에는 전선(戰船)이 썩고 군사는 장부에만 존재하여, 봄과 가을의 정기 조련(操鍊)도 지리멸렬해지는 실정이었다[『숙종실록보궐정오』 14년 6월 14일].

고종대에 이르러 통제영은 칙령(勅令) 제139호의 삼도통제영폐지건(三道統制營廢止件)과 칙령 제140호의 각 도 병영과 수영의 폐지에 관한 건[各道兵營水營廢止件]에 따라 폐지되었다[『고종실록』 32년 7월 15일].

[용례]
習水戰者 壬丁之變 倭旣傾國入寇 如入無人之境 惟於海路 因李舜臣一戰 遂不敢揚帆北上 以之龍灣命令 得通於湖南 而倡義諸將 久保江都 自是爲設統制營 以領舟師[『숙종실록보궐정오』 14년 6월 14일]

■ [집필자] 이왕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