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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태의원은 갑오개혁 때 내의원(內醫院), 전의사(典醫司)의 역할을 계승하여 1897년(광무 1) 설립된 기구이다. 왕과 왕실의 건강을 살피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의사가 태의원으로 바뀐 후 위상도 높아졌다. 고종은 구본신참(舊本新參)을 강조하면서 태의원이 옛 관례[舊例]를 회복한 것이라며 격을 올려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고종실록』 34년 1월 20일]. 기구 명칭을 바꾸어 왕과 왕실의 권위와 옛 관례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태의원의 조직 구성과 역할은 1905년 이후로도 유지되다가 1907년 11월의 관제 개정에서 시종원과 승녕부(承寧府)로 넘어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왕실의 의료는 내의원에서 관장하였다. 이후 1895년 4월 관제에서는 내의원을 고쳐 궁내부 시종원 아래 전의사를 두고서 전의(典醫)가 왕의 진찰과 약 제조를 담당하였다. 1897년 1월 황제국 체제하에서 이를 격상시켜 전의사를 태의원으로 개칭하였다.
[조직 및 역할]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하기 얼마 전인 1897년 1월 4일 궁내부 관제가 개정되었다. 이때 규장원(奎章院)은 규장각, 경연원(經筵院)은 홍문관, 전의사는 태의원으로 개칭되었다. 태의원에는 도제조(都提調), 경(卿), 소경(少卿)이 있었다. 칙임관인 도제조는 전·현직 의정(議政)이나 궁내부 대신이 겸임하였고, 경은 정2품 이상이 맡았으며, 주임관인 소경은 비서원승(秘書院丞)과 시강원 관리가 겸임하였다. 전의사가 태의원으로 개칭되면서 위상도 올라갔다.
태의원의 역할은 왕과 왕실의 건강을 살피는 것이었다. 당시 왕실 진료는 주로 한의(漢醫) 출신이 맡았으나 미국, 영국, 독일, 일본의 여의사 등이 초빙되어 궁중에 출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변천]
1905년 3월 4일의 궁내부 관제에서 칙임관인 도제조 1인, 경 1인, 부경 1인, 주임관인 전의 10인, 전의겸제약사장(典醫兼製藥師長) 1인, 주사 3인 등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1907년 11월 27일 궁내부 관제 개정에서 태의원의 기능은 시종원과 승녕부로 넘어갔다. 시종원에는 전의장(典醫長) 1인, 전의 5인, 제약사 1인, 의원 2인, 승녕부에는 전의 2인이 배치되었다. 1910년 일제의 강제 합병 후에는 이왕직(李王職) 아래 전의국(典醫局)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