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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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군영(親軍營)

서지사항
항목명친군영(親軍營)
용어구분용어용례
하위어친군좌·우영(親軍左·右營), 친군전·후영(親軍前·後營), 친군별영(親軍別營)
관련어양향청(糧餉廳)
분야정치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임오군란 이후 설치된 친군(親軍) 5영의 총칭. 혹은 친군 5영의 군수 지원을 위한 관청.

[내용]
1876년 개항 이후 정부의 개화정책이 본격화함에 따라 불이익을 받게 된 계층의 불만이 높아져갔다. 이 점은 군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신식군대인 교련병대의 창설과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대우는 군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첨예화시켰다. 구식군인들의 불만과 일반 백성들의 반일 감정 등으로 결국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이후 재집권한 대원군은 신식 군제를 해체하고 삼군부(三軍府)와 훈련도감을 비롯한 전통 군제를 복설하였다. 그러나 곧 이은 청의 개입으로 대원군은 실각하고, 청의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는 청의 군제를 따라 근대적 군제 개편을 하도록 고종을 설득하여 장정 1,000명을 선발하여 훈련원과 동영(東營)에서 교련시켰다. 1882년(고종 19) 11월 이 훈련부대를 각각 신건친군좌영(新建親軍左營)과 친군우영(親軍右營)으로 정식 설치했다. 이 친군 좌·우영은 청군식(淸軍式)으로 훈련을 받은 군대였다. 그리고 1883년(고종 20) 6월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의 군수지원 관청인 양향청(糧餉廳)을 친군 좌·우영의 군수지원을 위한 친군영(親軍營)으로 개편하였다.

한편 1883년 10월에는 교련소를 만들어 친군전영(親軍前營)으로 칭하고, 1884년에는 연무대로 이주한 부대를 친군후영(親軍後營)으로 삼았다. 이 친군전·후영은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은 군대였다. 이후 금위영(禁衛營)어영청(御營廳)을 통합하여 친군별영(親軍別營)을 만들어 경군의 친군 5영제(五營制)로의 개편이 완성되었다. 친군제영(親軍諸營)의 기본 조직은 영사(營使) 1명 밑에 병방(兵房)·영관(領官)·참군(參軍)·초관(哨官)·별군관(別軍官)·군의(軍醫)·초장(哨長)·집사(執事)·별무사(別武士) 등으로 구성되었다. 1888년 우영·후영·해방영(海防營)을 통합하여 통위영(統衛營)으로, 전영·좌영을 통합하여 장위영(壯衛營)으로, 별영을 총어영(摠禦營)으로 개편했다. 1891년 경리청(經理廳)을 복설하여 4영제가 성립했다. 1894년 갑오개혁 때 일본의 압력으로 완전 해체되었다.

[용례]
敎曰 糧餉廳 稱以親軍營 堂上以提調 下批 制度規例 與軍國衙門爛商 磨鍊節目以入[『고종실록』 20년 6월 24일]

[참고문헌]
■ 裵亢燮, 『19世紀 朝鮮의 軍事制度 硏究』, 國學資料院, 2002.
■ 崔炳鈺, 『開化期의 軍事政策硏究』, 景仁文化社, 2000.

■ [집필자] 김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