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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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總理大臣)

서지사항
항목명총리대신(總理大臣)
용어구분전문주석
동의어내각(內閣) 총리(總理)
관련어국무대신(國務大臣), 내각(內閣), 서리대신(署理大臣), 주임대신(主任大臣)
분야정치
유형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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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5년 내각(內閣) 관제(官制)를 도입한 뒤 대한제국기까지 내각을 총괄하던 대신의 직명.

[개설]
1895년(고종 32) 청일전쟁 이후 을미개혁을 단행하는 와중에 내각관제를 개편하면서 내각의 수반으로 임명한 직책이다. 원래 총리대신(總理大臣)의 명칭은 개항 이후부터 나타났다. 조선 정부가 1880년(고종 17) 12월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하고 총리대신을 영의정으로 임명하거나[『고종실록』 17년 12월 22일], 좌의정을 총리대신에 임명하였으나, 이는 을미개혁 이후의 총리대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고종실록』 18년 2월 5일]. 을미개혁 이후의 내각을 대표하는 총리대신은 내각의 논의를 왕에게 보고한 뒤 재가를 받아 공포하는 역할을 하였다. 정치 행사를 왕실과 정부의 이원 체제로 분리해서 근대적 정부 형태로 바꾸려는 조치의 일환이었다.

[담당 직무]
1895년 3월에 반포된 칙령 제38호인 내각 관제에 따르면 총리대신의 직무는 다음과 같다. 내각은 국무대신(國務大臣)으로 구성하며 내각 총리대신은 각 대신의 수반(首班)이다. 총리대신은 왕의 뜻을 받들어 행정 각 부(部)의 통일을 보장하며, 모든 중요한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과 주임대신(主任大臣)이 보고를 함께 행한다. 또한 내각 총리대신은 행정 각 부의 처분이나 명령에 대하여 다시 토의하여야 한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는 잠시 중지시키고 내각 회의를 거쳐 황제에게 보고하여 결재하기를 기다릴 수 있다. 총리대신은 관원의 임명에도 관여하였다. 즉 내각 총리대신은 관하 관리를 감독·통제하며 칙임관(勅任官)과 주임관(奏任官)의 진퇴(進退)는 내각 회의를 거쳐 황제에게 보고하고, 판임관(判任官) 이하는 전담하여 처리하였다. 또한 총리대신은 내각 회의를 거쳐 그 관하 관리의 품계를 올려주는 등의 문제를 요청할 수 있었다. 특히 정부의 주요한 안건들에 대해서도 총리가 내각회의를 거쳐, 주재하여 처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법률과 칙령안(勅令案), 세입(歲入)과 세출(歲出)의 예산과 결산, 내외 국채(國債)에 관한 사항, 국제 조약과 중요한 국제 문제, 각 부서 간의 주관 권한에 대한 쟁의(爭議), 신하와 백성의 상소(上疏)로서 특별히 대군주 폐하가 내려보낸 것, 예산 외의 지출, 칙임관과 주임관의 임명과 진퇴, 옛 규정의 존폐 및 변경과 관청을 없애고 설치하며 나누고 합치며 각 부에 전적으로 소속시킬지의 여부를 물론하고 정리와 개혁에 관계되는 일체의 사항, 조세를 새로 설치하거나 고치며 그대로 두거나 없애며 관청 소유 재산의 관리 처분에 관한 사항 등 10개 안건은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결정할 수 있었다[『고종실록』 32년 3월 25일].

총리대신의 지위는 칙령 제57호인 관등봉급령(官等俸給令)에도 잘 나타난다. 제2조에 따르면 칙임관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에는 왕이 수결(手決)하고 옥새를 찍게 되어있지만, 국무대신을 제외하고는 총리대신이 봉행(奉行)하며, 주임관의 임명장에는 내각의 인장을 찍고 총리대신이 선행(宣行)하도록 하였다. 제3조에는 총리대신이 칙임관의 임명장을 왕 앞에서 임명된 자에게 전달하도록 정하고 있다. 제4조에는 총리대신이 주임관의 임명장을 직접 선수(宣授)하도록 정해져 있다. 따라서 총리대신이 왕 다음으로 권한을 행사하거나 대행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총리대신의 연봉은 5,000원(元), 각부 대신은 4,000원이었다[『고종실록』 32년 3월 26일].

[변천]
1895년 11월 15일에 내각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이 내각 회의에서 새로운 연호(年號)를 건양(建陽)으로 할 것을 논의한 뒤 고종의 재가를 받아 반포하였다[『고종실록』 32년 11월 15일]. 또한 동시에 내각에서는 고종의 재가를 받아 1896년(건양 1)의 세입 480만 9,410원, 세출 631만 6,831원의 예산표를 반포하여 국가의 재정 규모를 대내외에 투명하게 하였다[『고종실록』 32년 11월 15일]. 명실공히 국가 실무를 총리대신이 주도하는 내각에서 주재하는 제국 정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총리대신의 권한은 이완용 내각에서처럼 일제가 한국을 강제로 합방시키는 과정에서 매국적 행위를 하는 용도로 악용되는 부작용도 보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주한공사관기록(駐韓公使館記錄)』
■ 『통감부일기(統監府日記)』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집필자] 정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