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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 군무아문에 소속되어 각 군영에 대한 사무를 맡아보던 부서.
[개설]
1894년 6월 군무아문(軍務衙門) 설립에 따라 그 하부 부서로 편성된 진방국은 중앙과 지방의 군제 개편을 주로 맡았다. 진방국에서는 1894년 8월부터 1895년 3월에 이르기까지 지방의 군영 제도에 대한 조사를 수행하였다. 이전의 관찰사나 병마절도사 등이 사용하던 병부(兵部) 제도 등은 폐지되었고, 1895년 5월에는 지방군의 개편을 도모하여 각종 군영도 폐지되었다. 1895년 4월 군무아문이 군부(軍部)로 개편되면서 진방국은 대부분의 업무를 군무국으로 넘기고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6월 28일 의정부를 중심으로 중앙 행정 기구를 전격 개편하였다. 이때 군무아문은 내무(內務) 이하 8아문의 하나로 개편되었다. 군무아문은 전국 육·해군 군정(軍政)을 통괄하고 군인과 군속(軍屬)을 감독하며 관내 여러 부서를 통솔하는 기관이었다. 관서로는 총무국, 친위국(親衛局), 진방국, 해군국(海軍局), 의무국(醫務局), 군수국(軍需局), 회계국으로 편성되었다. 진방국은 서울과 지방의 진방(鎭防)과 여러 진영(鎭營)의 사무를 관장하였으며, 중앙과 지방 군대의 개편을 맡았다.
[조직 및 역할]
군무아문 산하 진방국에는 참의가 1명, 주사가 8명이었다. 진방국은 이전 각 군영의 통합과 폐지 등 군사 제도의 개편을 주로 담당하였다.
1894년 7월 14일 친군영(親軍營)을 제외한 그 밖의 영(營)을 통합하고 대장 1명을 설치하여 명령은 대장 1명을 통해 나오도록 일원화하였다. 같은 해 7월 26일에는 경무(警務)가 이미 설치되었으니 각 영에서 발순(發巡)하는 것을 중지하고 무릇 범죄에 속한 것은 비록 각 영의 액례(掖隸)라고 하더라도 직접 잡지 못하도록 하였다.
1894년 8월 24일에는 군무아문에서 각 영의 영사들이 5일마다 군무대신과 함께 각 영과 관련된 현안들을 참조하여 군영의 규칙, 군대의 기강, 군량, 군영의 편제 등에 관한 것을 협의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8월 26일에는 지방 병제가 갈수록 해이해진다고 하면서 군무아문과 탁지아문에서 위원을 특파하여 각 도의 진보(鎭堡)와 산성을 순시하고 전곡(錢穀)의 출납과 병력 수를 상세히 조사하여 체계화하도록 하였다.
1894년 12월 10일에는 각 군영에 속했던 병방(兵房)과 문군사마(文軍士馬)는 중요하지 않은 관직에 속하므로 모두 줄이도록 하였다. 1895년 3월 1일에는 병부가 이미 효력을 상실하여 유명무실해졌다고 하면서 대책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3월 29일에는 이전의 군병과 군사 제도를 본격적으로 정비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의 관찰사와 병사(兵使) 등에 소속되어 있던 병사들의 수와 비용의 징수, 지판(支辦) 방법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또한 수영(水營)과 통제영(統制營) 폐지하는 법을 군부에서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1895년 5월 26일 각 지방의 감영, 안무영(按撫營), 유수부(留守府) 등이 폐지되어 각종 지방 군사에 관한 사항이 통폐합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 군제의 조정·개편에 이어 지방군은 모두 혁파되었다.
[변천]
1895년 4월 1일 새로 군부 관제가 제정되어 군무아문이 폐지되었다. 각 국의 개편도 이루어져 진방국은 군부 산하 군무국의 업무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