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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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조당(卽阼堂)

서지사항
항목명즉조당(卽阼堂)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운궁(慶運宮)
관련어대한제국(大韓帝國), 덕수궁(德壽宮), 정전(正殿), 중화전(中和殿), 황실(皇室)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 최초의 정전.

[개설]
즉조당은 본래 경운궁의 정전이었다. 이곳에서 인조의 즉위와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01년(광무 5)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中和殿)을 건립한 이후로는 정전으로 쓰이지 않았다[『고종실록』 39년 5월 12일].

[위치 및 용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 뒤쪽에는 선조 이후 경운궁의 역사를 함께했던 중요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건원문(乾元門)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가면 동쪽에 중층의 석어당(昔御堂)이 있고, 정면에는 서쪽에 준명당(浚明堂), 동쪽에 즉조당이 위치하고 있다.

[변천 및 현황]
즉조당은 경운궁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이었다. 즉조당은 선조가 환궁해서 정릉동 행궁에 머물 당시부터 경운궁에 있었으며 당시에는 선조의 침전으로 사용했다. 경운궁에서는 광해군과 인조가 왕으로 즉위했다. 광해군은 당시 다른 궁궐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정릉동 행궁, 즉 경운궁 서청(西廳)에서 즉위하였다. 반면 인조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광해군은 말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그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감금하여 폐위시켰다. 이런 이유로 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대의명분에 맞게 인목대비가 감금되었던 경운궁에서 즉위한 것이다. 이때 인조가 즉위한 건물이 즉조당이다.

즉조당이라는 당호는 영조대에 붙여진 당호이다. 1769년(영조 45) 영조는 경운궁에 들러 남겨진 두 채의 건물을 둘러보고 ‘양조개어(兩朝皆御)’,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라는 친필을 남기고 이것을 현판으로 만들어 걸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5년 11월 2일]. 영조는 1773년(영조 49)에 ‘석어당(昔御堂)’이라는 세 글자를 직접 써서 즉조당에 걸도록 하기도 있다[『영조실록』 49년 11월 4일].

고종대에 들어 1896년(고종 33)부터 경운궁을 중건하기는 했지만 경운궁에 마땅한 정전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즉조당은 경운궁의 정전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1897년(광무 1) 10월 9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이 모든 행사가 즉조당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기 이틀 전에 즉조당은 전호를 태극전(太極殿)으로 변경하였다[『고종실록』 34년 10월 7일]. 건축물의 등급을 황제 즉위에 적합하게 당(堂)에서 전(殿)으로 바꾼 것이다. 이렇게 이름 붙여진 태극전은 1898년(광무 2) 2월 13일에 다시 중화전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경운궁의 정전 역할을 담당하였다[『고종실록』 35년 2월 13일].

1901년(광무 5)에는 경운궁에 새로운 정전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법전(法殿)은 즉조당 전면 마당에 즉조당과 같은 축으로 건립되었다. 새롭게 건립한 법전을 중화전으로 명명하고, 옛 중화전은 원래대로 다시 즉조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종실록』 39년 5월 12일].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즉조당도 소실되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14일]. 즉조당은 곧바로 중건이 진행되어 다른 어떤 건물보다 일찍 복원되었다[『고종실록』 41년 4월 22일]. 즉조당을 중건하면서 고종은 간가(間架) 제도를 간단히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즉조당의 몸채는 화재 이전의 모습과 거의 같게 만들어졌다.


즉조당 중건 이후 즉조당에서는 별다른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1년 순헌귀비(純獻貴妃) 엄씨(嚴氏)가 이곳에서 서거하였다. 순헌귀비 엄씨는 영친왕의 어머니로 을미사변 이후 실제적인 왕비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황후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형태]
즉조당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평면을 하고 있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공포는 익공식인 몰익공을 사용하고 있으며, 겹처마를 사용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3년(고종 30) 고종은 즉조당에 나아가 전배하고 선조대왕이 수도에 환궁한 지300년을 축하하는 하례를 받고 사면을 반포하였다. 이때 중궁전(中宮殿), 왕세자와 세자빈궁(世子嬪宮)이 따라가서 예(禮)를 행하였다[『고종실록』 30년 10월 4일].

[참고문헌]
■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
■ 『[신축]진찬의궤([辛丑]進饌儀軌)』
■ 『[임인]진연의궤([壬寅]進宴儀軌)』
■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집필자] 이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