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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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靜觀軒)

서지사항
항목명정관헌(靜觀軒)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
관련어후원(後園), 휴게실(休憩室)
분야왕실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에 고종황제의 휴식 시설로 건축된 전통과 서양 절충식 건축물.

[개설]
정관헌은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경운궁에 있는 건축물로서, 전통과 서양 건축 양식이 절충된 형태이다. 휴게 시설로 지어졌으나 경운궁은 궐내에 전각이 충분히 많지 않은 상태에서 황궁이 되었기 때문에 선원전(璿源殿)이나 경운궁 화재 등으로 전각이 소실되었을 때는 정관헌을 다른 용도로 전용하기도 하였다.

1900년(광무 4) 선원전이 화재로 소실되고, 새로운 선원전을 건설하는 동안에 정관헌에는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진을 모시기도 하였다[『고종실록』 38년 2월 5일]. 정관헌은 서양식 건축의 공간 구성을 근간으로 벽돌로 지어졌으며, 전통 건축의 지붕 형식과 장식이 사용된 건축이다.

[위치 및 용도]
경운궁에서 침전인 함녕전(咸寧殿)과 편전인 덕홍전(德弘殿) 뒤편 언덕에 위치하며, 고종황제의 휴게 시설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정관헌은 대한제국기에 지어진 경운궁 내의 여느 서양식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건축 경위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건축가가 누구인지, 언제 지어졌는지, 그리고 어떠한 용도로 지었는지에 대해서도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당시 대한제국의 국제 관계와 정부에서 고용했던 서양인의 활동을 감안할 때 러시아인 사바틴([薩巴丁], A.I Sabatin)이 설계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경운궁 내 정관헌은 침전인 함녕전과 편전인 덕홍전 뒤에 위치해 있다. 비록 궁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지만, 언덕에 있는 까닭에 그 이름의 뜻처럼 휴게 시설로 사용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관헌이 갖고 있는 현 입지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보인다. 하나는 궁궐 내에 지어진 다른 서양식 건축과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건축 생산 시스템과 조직에 의한 건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정관헌이 황제의 사적인 공간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관헌이 지어진 연도도 역시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1897년(광무 1)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04년(광무 8) 경운궁 대화재로 경운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을 때, 고종이 즉조당(卽阼堂)과 석어당(昔御堂)만 남아 있던 옛 경운궁을 수리하여 대한제국의 황국으로 중수했다는 회고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1901년(광무 5) 2월 5일에 태조의 어진을 정관헌에 모시라는 고종의 명이 있으므로, 정관헌은 1897년과 1901년 사이에 지어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정관헌은 경운궁에 지어진 다른 서양 건축물에 비해 비교적 옛 사진 자료가 몇 장 남아 있는 편이다. 그러나 정관헌에 관한 모습을 제대로 그려 내기에 충분하지는 않다.

정관헌의 가장 오래된 모습은 1902년(광무 6)~1904년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운궁 전경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는 팔작지붕 형태의 정관헌 모습이 일부 보이며, 지붕 외곽에 높이가 낮은 처마가 둘러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존하는 정관헌의 모습과 일치한다. 이는 정관헌이 신축 당시에도 베란다가 설치된 건축이었음을 의미한다. 정관헌과 같은 서양 건물에 설치된 베란다는, 유럽 국가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지를 경영하며 고온다습한 식민지 기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서양 건축 양식을 새롭게 변형한 형태이다. 대한제국기의 서양 건축물에 베란다가 등장하는 것은 동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베란다 건축 양식이 청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정관헌의 변화를 알려 주는 중요한 사진으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오카다 미츠구의 사진이 있다. 이 사진에 따르면, 정관헌은 지금과 같은 기둥과 개부부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벽돌로 둘러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시기를 알 수 없는 때에 외부 벽체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확한 시점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938년 이왕직(李王職)에서 발행한 『덕수궁사(德壽宮史)』에 실린 정관헌 사진에 이미 기둥으로 교체되고 기둥 사이에 벽체가 없는 사진이 실려 있어, 1938년에는 이미 모습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후에 정관헌은 찻집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때 모습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 사이에 벽돌 벽체가 있고 벽돌 벽체에는 여닫이 창호가 설치되었다.

정관헌의 두 번에 걸친 변화 중 근본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는 벽돌 벽체에서 기둥으로의 변화는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추측은 가능하다. 1919년 고종황제가 서거한 후 이왕직에 의해 덕수궁이 관리되면서 1932년에 덕수궁의 중앙공원화가 진행되었다. 이때 많은 전각이 해체되었고, 석조전(石造殿) 등이 미술관으로 개조되었다. 이 점을 감안하면 정관헌도 덕수궁의 중앙공원화와 함께 모습이 변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형태]
정관헌은 큰 홀을 중심으로 전면과 좌우에 베란다가 설치되고, 후면에는 부속실이 배치되어 있는 단순한 구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공간적 명료함에 비해 양식적 특징은 간단하지 않다. 정관헌의 외벽은 붉은 벽돌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으로 구성되었고, 지붕은 전통 건축의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었다. 건축물의 외벽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 베란다 난간에는 콤퍼지트 양식[composite order]의 기둥이 사용되었다. 지붕의 재료와 구법은 양식 건축을 따르고 있지만, 베란다의 난간에는 박쥐와 소나무 등 전통적인 문양이 투각된 장식으로 구성되어 한식과 양식이 절충된 특징을 갖고 있다.

중앙의 주출입구와 양 측면에는 계단이 위치하는데, 계단으로 지상부에 올라온 만큼 지하층이 상부로 돌출되어 있다. 주출입구 바닥에는 타일을 사용하였다. 정관헌 타일은 중명전의 타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두 곳의 타일 디자인 패턴은 매우 유사하다.

정관헌의 내부는 큰 하나의 홀과 뒷면에 위치한 부속실로 구성되었다. 경운궁에서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 탓에 정관헌에서는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현재의 정관헌의 이러한 입지 특성이 반영되어 3면이 개방되어 있다. 그러나 촬영 시기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정관헌’이라는 현판이 보이는 한 사진에는 벽돌로 만든 벽체가 존재하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외벽체가 개조되었음을 의미한다.

정관헌을 둘러싸고 있는 베란다는 나무로 만든 서양의 콤퍼지트 양식 기둥과 소나무와 사슴 등 우리의 전통적인 문양이 장식된 난간으로 둘러쳐져 있다. 건물의 본체는 벽돌 벽체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기둥으로 둘러 싸였다. 돌처럼 보이는 기둥은 시멘트 물 씻기 기법에 의해 돌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00년 10월 14일 경운궁의 선원전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1901년(광무 5) 2월 5일, ‘태조 고황제의 준원전본 영정은 임시로 정관헌에 봉안하고, 열성조의 진전본 영정은 임시로 중화전(中和殿)에 봉안하는 것이 좋겠다.’는 황제의 명에 따라 정관헌에 어진이 모셔졌다[『고종실록』 38년 2월 5일]. 1902년 6월 21일에는 황제와 황태자의 영정을 그리는 일이 정관헌에서 있었고, 이때 그려진 황제의 영정은 흠문각(欽文閣)에 보관되었다[『고종실록』 39년 6월 21일].

[참고문헌]
■ 『조선일보(朝鮮日報)』, 1931년 5월 16일.
■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편, 『덕수궁 정관헌: 기록화 조사 보고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 2004.
■ 안창모, 『덕수궁: 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동녘, 2009.

■ [집필자] 안창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