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위치 및 용도]
저경궁의 위치는 19세기 중엽의 지도인 「조선경성도(朝鮮京城圖)」에,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향하는 남대문로 우측 편 길에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호현방(好賢坊),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 일대다. 원종의 제택이었다가 그 어머니인 인빈김씨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궁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저경궁의 자리에 있었던 송현궁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 사이에 태어난 정원군(定遠君)의 제택이었다. 정원군은 아들 능양군(綾陽君)이 반정으로 왕이 되면서 1633년(인조 10)에 추존(追尊)되어 원종(元宗)이 되었다.
송현궁에는 정원군 사후에 그의 자손들이 살면서 정원군 부부와 후궁인 인빈김씨의 신위를 모시고 있었다. 1633년 정원군이 추존되어 왕이 되자 그 신위는 종묘에 부묘(祔廟)되었고, 정원군의 친어머니였던 인빈김씨 또한 왕을 낳은 것으로 되어 그 신위를 영구히 보존하게 되었다. 즉 송현궁에는 인빈김씨의 신위만 남게 된 것이다.
1743년(영조 19) 인빈김씨의 사우(祠宇)는 여천군(驪川君) 이증(李增)의 집으로 옮겨져 의창군(義昌君)·낙선군(樂善君)과 같은 사당에 함께 봉안되었다[『영조실록』 19년 6월 13일]. 그러나 1749년(영조 25) 이증이 역적의 죄명으로 제주에 정배(定配)되자, 1755년(영조 31)에 인빈김씨의 신위를 다시 송현궁으로 옮겼다[『영조실록』 31년 6월 2일]. 그리고 인빈김씨에게 ‘경혜유덕(敬惠裕德)’이란 이름을 더하고 저경(儲慶)이란 궁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송현궁은 저경궁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인빈김씨를 제향하는 제사궁이 되었다.
1908년(융희 2)에는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 연호궁 등과 더불어 위패를 육상궁으로 옮겨 봉안했고 그 소유의 땅은 국유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