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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① 정조가 모후인 혜경궁 홍씨를 위하여 1777년(정조 1) 창경궁에 지은 전각.
② 1867년(고종 4) 대왕대비 신정왕후의 거처로 지은 경복궁의 대비전.
[개설]
① 창경궁의 자경전은 정조가 즉위 직후 생모인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를 위하여 통명전 북쪽 언덕에 지은 전각이다. 1865년(고종 2)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건하여 경복궁의 자미당(紫微堂)을 지었는데, 1873년(고종 10) 경복궁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종실록』 10년 12월 10일].
② 경복궁의 자경전은 고종대 경복궁 중건 당시 수렴청정 하던 대왕대비 신정왕후(神貞王后)를 위해 1867년에 지은 대비전이다[『고종실록』 4년 8월 18일]. 정조가 생모를 위해 창덕궁에 지었던 전각과 이름이 같은 데에는 고종이 정조와 익종을 계승한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되었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1888년(고종 25)에 재건된 것이다.
[위치 및 용도]
① 창경궁 자경전은 통명전(通明殿) 북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에는 혜경궁 홍씨가 거처하다가 정조 승하 후 왕대비가 된 정조 비 효의왕후(孝懿王后)에게 물려주었고, 효의왕후는 1821년(순조 21) 자경전에서 승하했다[『순조실록』 21년 3월 9일]. 순조대에는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주관으로 1827년(순조 27)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연회, 1828년(순조 28) 순조와 순조 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생신과 1829년(순조 29) 즉위기념 연회가 자경전에서 열렸다[『순조실록』 29년 2월 12일].
② 경복궁 자경전은 교태전(交泰殿) 동쪽에 있는데, 자미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자경전의 동쪽에는 궐내의 생활을 담당하는 처소가 있었다. 경복궁 중건이 완공된 후에서 즉위 10년까지 고종은 자경전에서 왕으로서 학문을 연마하는 강학을 자주 열었다.
[변천 및 현황]
① 창경궁의 자경전은 경복궁의 자미당으로 옮겨졌고 그 후 자경전 터는 빈터로 남았다. 일제 강점기에 자경전 터 동쪽 바로 옆에 이왕가(李王家) 박물관을 지었으며 박물관은 다시 장서각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② 경복궁의 자경전 터에는 원래 세종이 지은 청연루(淸燕樓)가 있었는데[『세종실록』 31년 6월 18일] 청연루는 중전과 대비의 처소였다. 고종대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청연루의 옛터에 자경전을 짓고 자경전 누마루의 명칭을 청연루라 하여 조선초기의 장소성을 유지했다. 1873년과 1876년(고종 13),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부(總督府) 박물관 사무실로 사용했고, 1985년에 자경전은 보물 제809호로, 뒤쪽에 있는 십장생굴뚝은 보물 제810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① 창경궁 자경전의 형태는 「동궐도(東闕圖)」, 『[기축]진찬의궤([己丑]進饌儀軌)』를 비롯한 순조대 의궤에 그림 자료가 있으나 자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공통적으로는 동·남·서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뒤편으로 화단[花階]이 조성되어 있다.
② 경복궁을 중건할 때 강녕전과 교태전 외에 석지당(錫祉堂), 덕필당(德必堂), 만경전(萬慶殿), 만화당(萬和堂), 흥복전(興福殿) 등 침전을 많이 지었다. 자경전은 그중에서 대왕대비를 위한 전각으로 부속 건물도 많았고 건물의 규모도 가장 컸다. 자경전은 가운데에 3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서온돌과 동온돌을 두었다. 양쪽 온돌 바깥쪽으로 마루가 1칸씩 있는 본 건물과 동온돌의 우측 전면으로 2칸 돌출된 청연루가 있으며, 서온돌 북쪽으로는 침방(寢房)인 복안당(福安堂)이 덧붙여졌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을 제외한 침전 중에서 가장 위계가 높다. 지붕마루에는 양상도회를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하여 전각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 후면의 담장에는 십장생과 박쥐무늬로 장식한 굴뚝이 설치되었다.
자경전의 동편으로 청연루와 연접한 협경당(協慶堂)은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가운데에 대청이 2칸이고 좌·우에 방이 2칸씩 대칭으로 있는 평면 구성이다. 동·서·남 행각으로 둘러싸인 내정이 있다. 남행각에는 만세문(萬歲門)이라는 평대문이 2칸 있으며 경례당(景禮堂)·광복당(光福堂)·봉서당(奉瑞堂)·소안당(紹安堂)이 있다. 동행각에는 천춘문(千春門)·함의당(咸宜堂), 서행각에는 자미당으로 통하는 함규문(含奎門)과 복광당(福光堂)이 있다. 「북궐도형(北闕圖形)」에는 자경전 북쪽 담장 밖에 북행각이 있는데, 독인당(篤仁堂)·승덕당(承德堂)·방휘당(芳輝堂)·봉희당(奉禧堂)의 당호가 붙어 있다. 서쪽 꽃담에는 연수문(燕壽門)이 있어서 자미당 북행각으로 통하고, 십장생 굴뚝 옆에 있는 여강문(如岡門)은 자경전 뒤뜰에서 북행각으로 통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73년(고종 10) 자경전 일곽의 북상실(北上室)인 순희당(純熙堂)에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일어나서 자경전을 비롯하여 교태전과 자미당 등이 소실되었다. 불이 날 당시 왕은 발화 지점과 가까운 자경전에서 진강(進講)을 하던 중이었는데, 침착하게 수정전(修政殿) 동행각 밖으로 나가 화재 상황을 지켜보았으며 10일 후 창덕궁으로 이어했다[『고종실록』 10년 12월 10일][『고종실록』 10년 1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