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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유학의 학문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학문의 계통인 도통(道統)을 만드는 과정에서 도통의 맥락 속에 포함되지 못한 별개의 학문적 가르침, 혹은 유학과 다른 본지(本旨)를 지니고 있는 비(非)유학적 학문을 지칭하는 말.
[개설]
공자(孔子)와 맹자(孟子)로부터 시작하는 유교의 가르침은 다른 본지를 지니고 있는 학문·사상과의 경쟁 속에서 힘들게 후대로 계승되어 갔기 때문에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이른바 도통을 정립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유교와 다른 본지를 지니고 있는 사상뿐만 아니라 주류적인 도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된 학설적인 흐름을 이른바 도통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측에서는 이단이라고 규정하였다.
[내용 및 변천]
유학사에서 이단으로 규정된 최초의 사례는 맹자가 이단으로 규정한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가르침은 맹자의 시각에서 볼 때 지극히 개인적이거나 지극히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공허하였고 따라서 배척되어야 했다. 그러나 진(秦)·한(漢)을 거쳐 수(隋)·당(唐)·송(宋)에 이르기까지 유교적인 가르침은 도교(道敎)와 불교(佛敎)에 밀려서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이에 당나라 말기 한유(韓愈) 같은 유학자는 도교와 불교의 비판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으로 유학의 부흥을 강력하게 부르짖으며 요(堯)임금-순(舜)임금-우(禹)임금-탕(湯)왕-문왕(文王)-무왕(武王)-주공(周公)-공자-맹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정립하였다. 한유의 뒤를 이어서 북송대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등도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여 비판을 가하였는데, 특히 남송의 주희(朱熹)는 불교를 허황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 유학은 실질적인 학문이라는 뜻의 실학(實學)으로 규정하면서 불교를 비판하고 극복하는 데 학문적인 열정을 쏟았다. 그런데 주희는 불교뿐 아니라 유학적인 계보 속에 있는 동시대의 육구연(陸九淵)의 학문까지 이단으로 비판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학문을 유학의 본령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듯하다. 이후 주자학에서는 육구연의 학문을 잇는 것으로 이해되는 명대의 양명학(陽明學)을 이단으로 규정했다.
중국 학술사에서의 이단관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미 고려시대에 안향(安珦)은 불교를 인륜을 저버린 이적(夷狄)의 도로서 비판하였고 정몽주(鄭夢周), 정도전(鄭道傳) 등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불교 비판에 앞장섰다. 조선후기, 특히 병자호란이 끝나고 오랑캐로 인식된 청나라가 중국을 장악하면서 조선은 조선만이 천하에 유일하게 남은 중화의 계승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이전보다 더욱 엄격하게 주자학은 유일주의의 모습을 띠게 되고 이 과정에서 주희의 해석과 다른 입장의 표출은 곧 이단으로서 강하게 배척당했다. 박세당(朴世堂)과 윤휴(尹鑴)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인데, 이들은 유학을 어지럽히고 나라에 해를 끼친 죄인이라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었다[『숙종실록』 13년 3월 21일] [『숙종실록』 29년 4월 17일].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는 주로 천주교(天主敎)로 대표되는 서학(西學)이 이단 논의의 중심에 있었다. 이는 일본을 포함한 서구 여러 나라의 침입이 본격화되던 시기에, 이에 대항하여 전개된 위정척사의 정신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이단의 규정은 유교가 역사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자기 확인의 중요한 절차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조민환, 「유학의 이단관 연구」, 『철학』63, 2000.
■ 한정길, 「유학에서의 정통과 이단」, 『율곡사상연구』21, 2010.
■ 황의동, 「정통과 이단, 그 역사와 본질」, 『율곡사상연구』21, 2010.
■ 이용주, 「주희의 문화적 정통의식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