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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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국(衛生局)

서지사항
항목명위생국(衛生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갑오개혁(甲午改革), 내무아문(內務衙門), 내부(內部)
하위어위생과(衛生課), 의무과(醫務課), 종두의(種痘醫) 양성소(養成所),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
관련어위생론(衛生論), 우두법(牛痘法),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경무청(警務廳) 관제(官制), 방역 위원회(防疫 委員會), 법정 전염병(法定 傳染病), 경무국(警務局)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갑오개혁으로 설치된 근대적 위생 행정 기구.

[개설]
위생국은 갑오개혁 때 신설되었으며 내무아문(內務衙門) 소속으로 국가 의역(醫譯)과 위생 행정의 최고 기관이었다. 1895년(고종 32)부터는 내부(內部) 소속으로 바뀌었다. 전염병 예방, 의약(醫藥) 관리, 우두(牛痘) 등의 사무를 맡았다. 1905년 2월 관제 개혁 시에 위생과로 축소되었다가 1907년(순종 1) 12월에 다시 위생국으로 설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개항 이후 전염병을 관리하여 인구를 증식하고 더 나아가 국가를 부강하게 한다는 위생론이 개화파들 사이에서 대두하였다. 1880년대 초반 개화파는 일본을 통해 우두법, 도로 정비를 담은 환경 위생 사업, 병원 등 근대 보건 의료를 학습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 기구의 효율성을 위해 혜민서(惠民署)활인서(活人署)가 혁파되고, 우두법과 환경 위생 사업 등의 활동이 이루어졌다.

당시 『한성순보』를 통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전염병 관리 방법과 개인 위생법 등 근대 위생론이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가 뚜렷한 성과를 보였다는 기록은 없으며, 지석영이 운영하던 우두 접종소가 불태워진 데서 알 수 있듯이 우두법에 대한 인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지만 보건 의료의 가장 큰 틀은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을 주축으로 하는 체제였다.

1888년(고종 25) 박영효는 건백서(建白書)에서 개인위생과 공중위생, 의료, 더 나아가 인구 일반의 내용까지 폭넓게 담았다. 유길준도 『서유견문』에서 위생 경찰과 함께 국가적 보건 의료 행정 기관인 위생국의 설치를 주장하고 위생을 개인의 권리라고 주장하였다. 개항 이후 다양한 위생론이 대두하는 가운데 갑오개혁으로 중앙 행정 기관인 위생국이 설치된 것이다.

1894년 내무아문 안에 위생국을 두고 전염병 예방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며 의약, 종두(種痘) 등에 관한 사무를 겸하여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위생국은 한동안 문서상의 기관에 불과하여 참의(參議)인 위생국장은 다른 관서를 겸직하였고 정원 2명인 주사(主事)는 임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위생국이 설치되면서 조선 정부가 기울이는 국민의 보건 의료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위생 행정의 도입은 국가 부강과 연결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직 및 역할]
위생국이 약간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은 이듬해인 1895년 3월 의정부가 내각 관제로 개편하면서부터였다. 내무아문의 후신인 내부에는 위생국을 포함하여 모두 5국이 설치되었다. 위생국은 회계국과 함께 3등국이었다. 대한제국기에는 위생국장이 모두 한의사였다.

새로운 내부 관제에 따르면, 위생국은 전염병·지방병의 예방, 종두와 기타 모든 공중위생에 관한 사항, 의사·약제사의 업무와 약품 매매의 관리와 조사에 관한 사항 등을 맡았다. 그리고 여기에 검역, 정박한 배[船]의 소독과 검역 등 방역 관련 사항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1894년 관제보다 한층 진일보한 내용이었다. 이로써 근대 보건 의료 행정의 세 부분인 전염병 관리, 의료 관리, 약품 관리, 방역 사업 등을 망라한 종합적 행정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위생국의 분과로는 위생과와 의무과를 두었다. 위생과에서는 전염병·지방병·종두·기타 공중위생에 관한 사항을 담당했고, 의무과에서는 의약·병원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였다.

위생국이 제도적 측면에서의 행정을 맡았다면, 경찰은 실무적인 측면에서 위생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1894년에 마련된 「경무청 관제」에서도 경무청은 전염병 예방, 소독, 검역뿐만 아니라 종두, 음식, 먹는 물, 의약, 가축, 도살장, 묘지 등 기타 위생과 관련된 모든 사무를 담당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리고 경찰은 위생국 업무를 실제적으로 집행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듬해 5월 관제 개편에서 경무청은 관할 업무로 위생 경찰을 구체화하였다.

1895년 5월 의주에서 시작된 콜레라가 북한 지방과 서울에까지 창궐하자 내부에서는 외국인 의사가 중심이 된 방역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위생국 관리가 조선 정부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당시 내부에서는 유길준의 주도하에 콜레라 방역을 위한 각종 법령을 반포하고 아울러 검역소와 피병원(避病院)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여기에는 상당한 예산이 집행되었으며, 많은 위생국과 경찰의 인력이 투입되었다. 갑오개혁 과정에서 설치된 위생국의 관여 아래 진행된 방역 활동은 조선에서 새로운 보건 위생 체계가 출발했음을 의미했다.

위생국은 종두의(種痘醫) 양성소(養成所)를 관할하고 한성종두사를 지휘하는 등 우두 사업을 지휘하였다. 공중위생과 관련해서는 한성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내부 대신, 한성부 관찰사, 내부 위생국장 등이 ‘공중위생 전반에 관한 조목’을 만들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도로·하천·가옥의 정비와 주변 청결을 위한 방법을 담고 있었다. 아울러 콜레라·장티푸스·이질·디프테리아·천연두 등을 법정 전염병으로 규정하고 각각의 예방 규칙을 마련하여 반포하였다.

그런데 1902년에도 콜레라가 유행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외국인 의사가 참여한 임시 위생원을 만들어 대처하였다. 이때는 경무사 이용익(李容翊)이 임시 위생원 감독을 맡으면서 임시 위생원은 대체로 경찰관이 주도하는 구조였다.

[변천]
1905년(고종 42) 2월 관제 정비와 함께 내부의 위생국은 지방국의 위생과로 행정적 지위가 낮아졌다. 이때 일본인 경무고문은 내부 위생과를 내부 경무국(警務局)으로 이관시키려 하였다. 그 결과 1906년 1월 내부 관제가 개정되어 과거 위생국이 맡았던 종두를 비롯한 공중위생, 검역과 선박 검사 업무, 의사와 의약에 대한 사업 등 위생과 관련된 전반적인 분야가 경무국으로 귀속되었다. 이에 내부 경무국에는 위생 사무만을 담당하는 위생과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처럼 위생 관련 업무가 모두 경찰에 귀속된 것은 식민지 위생 보건 체계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907년 12월에 다시 내부에 위생국이 설치되어 한일병합 때까지 유지되었지만, 국내 위생 관련 업무는 여전히 위생 경찰이 주도하였고 위생국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위생국은 1910년 한일병합 때까지 존속하였다.

[참고문헌]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 근대 법령 자료집 1~9』, 국회도서관, 1970~1972.
■ 박윤재, 「한말·일제 초 근대적 의학 체계의 형성과 식민 지배」,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신동원, 「한국 근대 보건 의료 체제의 형성, 1876~1910」,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 [집필자] 은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