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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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外部)

서지사항
항목명외부(外部)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내각(內閣), 의정부(議政府) 관제(官制)
하위어대신관방(大臣官房), 교섭국(交涉局), 통상국(通商局)
관련어외무아문(外務衙門), 조약(條約), 감리서(監理署), 갑오개혁(甲午改革), 의정부(議政府) 외사국(外事局)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895년 4월 갑오개혁부터 대한제국기까지 대외 교섭 업무를 담당하였던 중앙 행정 관서.

[개설]
1895년 4월 새로 개편된 외부는 이전의 외무아문을 계승하였다. 외부는 외국과의 교섭·통상 사무를 관장하고 공사(公使), 영사(領事) 등의 외교관을 감독하는 중앙 관청이었다. 부속 부서로는 대신관방(大臣官房), 교섭국, 통상국을 두었다. 갑오개혁 이후 외국의 이권 침탈에 따른 각종 교섭, 분쟁 등을 처리하였다. 대한제국기에 들어와서도 외교 교섭의 주무 기관이었다. 1904년 2월 이후 일본의 부당한 간섭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1906년 1월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외부의 업무는 일본의 외무성으로 옮겨졌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5년 4월 1일 2차 갑오개혁의 중앙 행정 기구 개편에서 칙령 42호로 이전의 외무아문을 외부로 개칭하였다. 외부는 외국과의 교섭·통상 사무를 관장하고 공사, 영사 등의 외교관을 감독하는 중앙 관청이었다.

[조직 및 역할]
외부에는 대신관방과 교섭국, 통상국 등의 관서를 두었다. 교섭국은 1등국이고 통상국은 2등국이었다. 대신관방에서는 관제 통칙에 든 것 외에 조약서 보관, 문서 번역, 본부(本部)에서 관리하는 경비와 각종 수입의 예산 결산과 회계, 본부에서 관할하는 관청 소유의 재산과 물품의 관리와 그 장부의 작성에 관한 사항 등을 맡았다. 교섭국에서는 외교에 관한 사무를 맡았으며, 통상국에서는 통상·항해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이 외에도 교섭국과 통상국에서는 한·청 신조약 등 외국과의 외교 교섭에 대한 문의, 외국인 초빙에 관한 사항, 청나라와의 경계 획정에 관한 사항, 한성 내 5부의 관유지(官有地) 설정과 외국인 잡거지(雜居地)에 대한 사항, 각지 개항장 감리(監理)와의 외교 문제에 대한 교섭 등을 담당하였다. 또한 외부와 외국 주재 공사관이나 각 지방의 감리서에 종사하는 관리의 인사에 관한 사항으로 선출과 승진, 강등, 해임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특히 개항장 조계(租界)의 확장이나 외국 열강과의 이권 쟁탈에 관한 사항, 천주교도와 선교사 문제, 광산 개발에 따른 현지민과의 분쟁, 전차 가설과 전기 회사 설립, 일본 상민과의 투쟁, 각급 학교에 파견된 일어 교사·군사 교사 등과 관련한 사항 등을 담당하였다. 특히 외국인이 몰래 국내 토지를 구입하는 것과 관련하여 각지의 외국인 토지 소유자들에 대해 조사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은 각국 외국인과의 갈등도 담당하였다.

외부 관제(官制)에서 외부 대신(大臣)은 외국에 관한 정무를 집행하여 주로 외국과의 교섭, 외교관의 파송, 외국인의 영접 등을 맡았다. 또한 외국에 있는 본국 상사(商事)의 보호에 관한 사무를 관리하며 외교관(外交官)과 영사관(領事官)을 감독하였다. 외부의 전임 참서관(參書官)은 3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외부에는 2명 이하의 번역관(繙譯官)과 3명 이하의 번역관보(繙譯官補)를 두었다. 번역관은 주임관(奏任官)으로서 문서 번역을 맡았고 번역관보는 판임관(判任官)으로서 번역관의 사무를 도왔다. 외부 주사(主事)는 12명을 정원으로 하였다.

[변천]
1896년 2월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기에도 외부의 권한과 직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대한제국 정부는 국외에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대한제국에 주둔하였다. 같은 해 2월 23일 일본 특명 전권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시정(施政) 개선과 군사적 협조를 약속한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게 하였다. 8월 22일에는 다시 한·일 1차 협약을 맺어 대한제국 정부에 외국인 1명을 외교 고문으로 초빙하게 하였다. 또한 대한제국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 미리 일본 정부와 협의할 것 등을 규정하여 외교적 간섭을 보장하는 조약을 맺었다.

1905년 2월 22일 주한 일본공사는 재외 외국 주재 공사의 소환 등을 요구했다. 11월 16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고 요구하는 통고 공문과 한일협상조약안을 외부 대신에게 제출하여 의정부에서 통과되기를 강요하였다. 마침내 17일 밤, 일본 특명 전권 대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와 주차군사령관(駐箚軍司令官)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위협과 강제를 가해, 외부 대신 박제순을 비롯한 을사 매국 5대신의 찬동으로 한일협상조약, 즉 을사늑약을 조인하게 하였다.

1906년 1월 17일, 외교권의 박탈에 따라 외부는 폐지되었으며, 외부가 담당하던 주요 업무는 일본의 외무성으로 이관되었다. 나머지 업무는 의정부 외사국(外事局)으로 이전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속음청사(續陰晴史)』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1~40, 국사편찬위원회, 1986~1994.
■ 국사편찬위원회 편, 『대한계년사』하, 우종사, 1957.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구한국관보』, 아세아문화사, 1973.

■ [집필자] 왕현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