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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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문(永成門)

서지사항
항목명영성문(永成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경운궁(慶運宮)
관련어덕수궁(德壽宮), 대한제국(大韓帝國), 정동(貞洞), 홍원(紅園), 양화당(養花堂), 화원(花苑), 양어지(養魚池), 장옹대(醬瓮臺)
분야정치
유형건축·능 원 묘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의 본 궁궐과 떨어져 러시아 공사관 방향인 서북쪽에 만들어진 또 다른 궁궐 영역의 북문.

[개설]
경운궁 본 건물과 떨어져 있는 서북쪽에서 궁궐 외부로 출입하고자 하는 경우는 대부분 영성문을 이용하였다. 영성문을 통해 외부로 나가면 곧바로 경희궁과 서대문, 종로에 다다를 수 있다.

[위치 및 용도]
경운궁 서북쪽에 있었으며 문으로서의 기능 외에 상례(喪禮) 의식이 치러지기도 했다.

[변천 및 현황]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경운궁을 크게 중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본래 경운궁이 차지하고 있는 정동의 대지가 넉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주변에 영국 영사관, 미국 영사관 등 각국 영사관이 자리 잡고 있어 궁궐의 영역을 쉽게 확장하지는 못했다. 이에 경운궁을 구성하는 건물을 여러 곳으로 분산해 건립했으며 이들을 아우르는 궁장 역시 별도로 건립했다. 그 결과 경운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미국 영사관, 영국 영사관 북쪽에 위치한 영역은 주로 혼전 및 빈전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곳에 위치한 건물로 흥덕전(興德殿), 문경전(文慶殿), 회안전(會安殿) 등을 들 수 있다. 1900년에는 경운궁 포덕문 내에 위치하고 있던 선원전(璿源殿)이 소실되면서 새로운 선원전을 영성문 내에 건립하였다[『고종실록』 38년 2월 5일]. 이들 건물에서 궁장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영성문을 사용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후대의 신문기사에서는 이곳을 ‘영성문 대궐’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영성문에서 치러진 의식은 대부분 발인 의식, 삼년상을 위해 우주(虞主)를 맞아들이는 의식, 종묘로 우주를 보내는 의식과 같이 상례가 대부분이었다[『고종실록』 42년 2월 18일].

영성문 대궐 내에는 상례와 제례를 위한 건물 외에 홍원(紅園)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홍원은 경운궁의 후원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양화당(養花堂) 및 화원(花苑), 양어지(養魚池), 장옹대(醬瓮臺) 등이 위치하고 있었다. 또 1906년에는 이곳에 수학원(修學院)을 만들기도 했다. 수학원은 궁내부에 소속된 기구로 황족과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수학원을 구성하는 건물로 함희당(咸喜堂), 양이재(養怡齋)를 들 수 있는데 현재 대한성공회 성당 내에 양이재가 이건되어 있다.


고종이 서거하고 1년이 지난 1920년, 영성문 대궐의 훼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순종이 창덕궁에 있었기 때문에 순명황후 민씨의 혼전인 의효전(懿孝殿) 및 선원전을 창덕궁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창덕궁에는 선원전이 있었기 때문에 이건할 이유가 없었으며, 이것은 한양의 중심부에 위치한 영성문 대궐의 토지를 외부에 매각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결국 1920년에 조선은행, 식산은행, 경성일보사 등에 이곳의 토지를 매각하면서 영성문 대궐은 해체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911년 순헌귀비 엄씨의 상여가 영성문을 통해 나갔으며 고종과 순종, 영친왕이 배송하였다.

[참고문헌]
■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 [집필자] 이연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