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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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둔토(驛屯土)

서지사항
항목명역둔토(驛屯土)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둔전(屯田)
하위어공수전(公須田), 장전(長田), 부장전(副長田), 급주전(急走田), 마위전(馬位田), 국둔전(國屯田), 관둔전(官屯田)
관련어역토(驛土), 둔토(屯土), 관둔전(官屯田), 중답주(中畓主)
분야경제
유형개념용어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 역과 군·아문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둔토.

[개설]
역둔토(驛屯土)는 역토와 둔토(屯土)를 아우르는 말이었다. 역토는 조선초 역참제도가 정비되면서 각 역(驛)의 경비를 마련하고, 입마(立馬)와 역역(驛役) 동원의 대가로 지급된 토지를 일컬었다. 한편 둔토는 군량을 비축하고 정부관서의 경비를 보전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거칠어 버려둔 토지인 진황지나 주인 없는 무주지를 지급하여 경작하게 한 토지였다.

조선전기에는 군량을 마련하기 위한 국둔전과 지방관청의 경비를 보전하기 위하여 관둔전이 지급되는 정도였지만, 조선후기에는 신설 군문과 영·아문에서 자체적으로 둔전을 확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역둔토는 갑오개혁기에 모두 세금을 부담하는 출세지로 전환되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왕실 재산을 관리하던 내장원(內藏院)에 귀속되었다. 이후 일제가 이를 조사하여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민간에 불하함으로써 둔전과 같은 전근대적 토지지배 방식은 소멸되었다.

[내용 및 특징]
역토는 공수전(公須田)·유역인전(長田, 副長田, 急走田)·마위전(馬位田)으로 구분되었다.

공수전은 역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지급된 토지로서, 대로변의 역에는 20결, 중로변에는 15결, 소로변에는 5결이 지급되었다[『세종실록』 6년 3월 25일]. 유역인전은 역역의 대가로 역장과 부역장 및 급주졸(急走卒)에게 지급된 토지였다. 공수전과 유역인전은 개인에게 조세 징수권을 준 각자수세지(各自收稅地)로서 일반 민유지에 수세권(收稅權)만 부여된 토지였다. 반면 마위전은 역마(驛馬)를 사육하는 대가로 역리·역졸·관군에게 지급된 토지로, 역토 가운데 비중이 가장 컸다. ‘삼정을 일호로 편제하여[三丁一戶]’ 호수(戶首)에게 토지를 분급하였으며[『성종실록』 15년 5월 18일], 역호가 마위전을 직접 경작하는 자경무세전(自耕無稅田)으로 운영되었다. 즉, 마위전에서 나는 소출은 중앙에 상납하지 않고 해당 역에서 말을 사육하고 입마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한편 둔토는 정부관서와 군사기구를 지탱하는 물적 토대로서, 국둔전(國屯田)관둔전(官屯田)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세조실록』 4년 8월 22일][『세조실록』 7년 1월 11일]. 국둔전은 군자(軍資)를 확보할 목적으로 설치한 국가 소유지로서 각 도 관찰사가 관리하였다. 관둔전은 재정 보용을 목표로 지방관아와 영(營)·진(鎭) 등 군사기구에 설치된 토지로, 해당 관서에서 관리하였다. 둔전은 개간 가능한 황무지나 무주지를 지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양란(兩亂)을 거치면서 신설 군문에서 둔전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민유지를 불법으로 탈점하는 폐단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변천]
역토 중 각자수세지인 공수전과 유역인전은 역참에서 일반 민전에 세를 거두는 권한만 부여된 토지였다. 반면 자경무세지인 마위전은 역에 복무하는 자들이 토지에서 나는 소출로 말을 먹이고 입마하는 비용을 충당하는 토지였다. 자경무세지의 경우 역민들이 고된 역역에 시달리기 일쑤였고, 토지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후기 들어서는 다른 사람에게 소작을 주는 병작제 방식이 자주 활용되었다. 역토를 경작하는 자들 역시 점차 비역역인(非驛役人)인 양반 지주층으로 바뀌어 갔다. 역에서 복무하는 자들은 고된 역역(驛役)에 종사해야 하는 한편, 마위전을 경작하여 입마비(立馬費)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양반 토호에게 역토를 처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궁방에서도 마위전 등 역토를 침탈하는 사례가 나타났다[『숙종실록』 30년 7월 20일]. 이처럼 역전이 양반 토호와 궁가에 잠식당하는 상황에서 일부 지주들은 역전을 작인에게 경작케 하여 영·아문에 지대를 납부하고 남은 중간의 차익을 꾀하는 중답주(中畓主)로 변하여 갔으며, 이로써 역토 내부에는 중층적인 소유·경영 관계가 형성되었다.

한편 둔토는 세조대 이래 국둔전과 관둔전으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그러나 국둔전·관둔전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고,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양반 토호층의 사적 점유로 쇠퇴 일로에 놓였다. 양란을 거치면서 신설군문과 영·아문 그리고 궁방에 의하여 다양한 형태의 둔전이 설치되었다. 둔토의 설치는 17세기에는 주로 왕이 하사하는 사여와 황무지나 묵정밭에 대한 소유권을 주는 절수를 통해서, 18세기에는 왕실이 민전을 사들이는 급가매토(給價買土)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급가매토는 더 이상 절수할 무주진황지가 존재하지 않게 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둔토의 소유·경영 형태는 둔전이 실질적인 토지에 근거한 것인지[有土屯土] 수조권만을 부여받은 것인지[無土屯土]에 따라 다시 분화되었다. 유토 둔토는 그 소유권이 일차적으로 영·아문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영·아문에서는 이 토지를 가지고 지주경영을 할 수 있었다. 유토 둔토의 경영 방식은 18세기 초엽까지는 임대해 준 토지의 수확량을 절반으로 나눠 갖는 병작제가 우세하였으나 19세기에는 일정한 지대를 정해 놓고 작황 상황에 관계없이 일정한 소작료를 내는 도지제(賭地制)가 확대되었다. 무토 둔토는 애초에 민전에 설정된 것이었기 때문에, 민전지주는 국가에 납부할 토지세를 해당 영·아문에 둔전세로 납부하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오면 유토 둔토는 또다시 1종 유토와 2종 유토로 구분되어, 2종 유토는 민유지로 인정되었다. 1종 유토는 영·아문이 매득하거나 직접 개간하여 설치한 둔토로 영·아문과 농민이 직접적인 수취-지배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에 반하여 2종 유토는 민유지를 둔토로 편입시킨 것으로서, 이 둔토는 ‘영·아문-지주-소작농민’이라는 중층적인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토지였다. 2종 유토와 무토 둔토가 증가함에 따라 영·아문이 종전과 같이 직접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둔토는 전체의 20% 정도에 불과하게 되었다. 이는 민의 사적 토지 소유권이 성장하고 기존의 둔토 경영 방식이 유명무실해졌음을 뜻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김용섭, 『朝鮮後期農業史硏究1』, 지식산업사, 1995.
■ 이경식, 『朝鮮前記 土地制度 硏究 : 農業經營과 地主制』, 지식산업사, 1998.
■ 이영훈, 『朝鮮後期 社會經濟史』, 한길사, 1988.
■ 김양식, 「대한제국·일제하 역둔토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 [집필자] 최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