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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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궁(壽進宮)

서지사항
항목명수진궁(壽進宮)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궁가(宮家), 제사궁(祭祀宮)
관련어내수사(內需司), 내탕(內帑), 명례궁(明禮宮), 어의궁(於義宮), 왕실(王室), 용동궁(龍洞宮),
분야왕실
유형건축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제택(第宅).

[개설]
수진궁은 예종의 아들이지만 왕이 되지 못한 제안대군의 궁가(宮家)이다. 제안대군은 세종의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의 가계를 이은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후기에는 대를 이을 후사 없이 죽은 대군이나 왕자, 혼인하지 못하고 죽은 공주나 옹주, 후사 없이 죽은 후궁들의 제향을 담당하던 제사궁(祭祀宮)으로 쓰였다. 한편으로는 왕실의 도서를 보관하는 곳으로도 기능했다. 1909년(융희 3)까지 존속되었다.

[위치 및 용도]
제안대군의 궁가였다가 조선후기에는 후사 없이 죽은 왕의 자녀와 후궁에게 제사 지내는 제사궁으로 변하였다. 한성부 중부 수진방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일대다.


[변천 및 현황]
수진궁은 조선 제8대 왕인 예종의 둘째 아들 제안대군의 궁가로 건립되었다. 제안대군은 형 인성대군이 요절했기 때문에 1469년(성종 즉위) 아버지 예종이 죽을 당시 왕위를 이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자을산군, 즉 성종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왕이 되지 못하고 이듬해 제안대군에 봉해졌다. 이후 왕이 된 성종의 정치 인생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정희왕후와 왕실 원로대신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 등이 논하여, 1483년(성종 14) 죽은 세종의 셋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제사를 모시는 봉사손(奉祀孫)으로 입양시켰다.

제안대군의 제택이 새로 건립된 것은 제안대군 사후인 1544년(중종 39)의 일이다. 인조 연간 이후로는 후사가 없는 왕자(王子)의 가재(家財), 대비전(大妃殿)의 사탕(私帑)을 조달하고 관리하는 곳으로 기능했다. 숙종 연간에는 효종 비였던 명성왕후(明聖王后)의 명으로, 후사가 없는 대군(大君)·왕자·공주·후궁의 제사를 받드는 곳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완전한 제사궁이 되었다.

1798년(정조 22) 수진궁에서 제향을 담당하던 신위는 5묘(廟) 15위(位)였다. 평원대군·강령부부인(江寧府夫人)·제안대군·상산부부인(商山府夫人)·영창대군(永昌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 이상 6위를 1묘에 봉안하고, 의창군(義昌君)·양천군부인(陽川郡夫人)·평선군(平善君)·동원군부인(東原郡夫人) 이상 4위를 1묘에 봉안하였다. 또한 숙신공주(淑愼公主) 1위를 1묘에 봉안하고, 명선공주(明善公主)·명혜공주(明惠公主)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였으며, 귀인김씨(貴人金氏), 소의유씨(昭儀劉氏) 이상 2위를 1묘에 봉안하였다[『정조실록』 22년 9월 7일].

묘소는 총 20위이다. 평원대군, 강령부부인, 제안대군, 상산부부인, 영창대군, 명선공주, 명혜공주 등 이상 7위의 묘소는 광주(廣州)에 있었고, 용성대군, 의창군, 양천군부인 등 이상 3위의 묘소는 풍양(豐壤)에 있었다. 낙선군(樂善君)과 동원군부인의 묘소는 청송(靑松)에, 숙신공주의 묘소는 서산(西山)에, 귀인김씨의 묘소는 망우리(忘憂里)에, 소의유씨의 묘소는 진관(津寬)에 있었다. 대군 아기씨(大君阿只氏)의 묘소는 광주에, 숙의나씨(淑儀羅氏)의 묘소는 서산에, 숙원장씨(淑媛張氏)의 묘소는 연서(延曙)에, 명빈김씨(明嬪金氏)의 묘소는 아차산(峨嵯山)에, 증 경빈이씨(慶嬪李氏)의 묘소는 풍양에 있었다. 이상은 매년 한식에 제사를 지냈다.

수진궁은 내수사(內需司), 용동궁(龍洞宮), 어의궁(於義宮), 명례궁(明禮宮)과 더불어 조선후기 왕실의 내탕을 조달하고 관리하던 궁이었다. 하지만 궁내부령(宮內府令)에 의하여 1907년(융희 1)에 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도장을 폐지하고 제실 재산 정리국 관제(帝室財産整理局官制)에 의하여 모든 재산이 제실관리국으로 넘어갔다[『순종실록』 즉위 11월 27일 3번째기사].

■ [집필자] 정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