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사전을 편찬하고 인터넷으로 서비스하여 국내외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와 일반 독자들이 왕조실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학술 문화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인문정보의 대중화를 선도하여 문화 산업 분야에서 실록의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반을 조성하고자 합니다.
[개설]
수옥헌은 1898년(광무 2)경에 만들어져 1901년(광무 5) 화재로 소실된 후[『고종실록』 38년 11월 16일], 다시 재건되어 현재와 같은 중층의 조적식(組積式) 구조 건물이 되었다. 역사서에는 1906년(광무 10) 이후 수옥헌 대신에 중명전(重明殿)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감수한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오다쇼고[小田省吾]는 『덕수궁사(德壽宮史)』에서 수옥헌에 대해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이 건물을 포함한 모든 전각의 총칭이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위치 및 용도]
현재 서울 중구 정동극장 왼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중층의 조적식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은 경운궁의 중명전으로 예전에는 중명전 인근 지역이 경운궁의 한 영역을 이루고 있었다. 용도는 왕실 도서관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1904년(광무 8)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이 거처할 때는 도서관의 기능보다 침점과 편전의 용도 및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현재까지 수옥헌과 관련된 자료로 가장 오래된 것은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는 1899년(광무 3) 3월이라는 촬영 시기와 각 건물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건물 중에서 수옥헌은 사진의 왼쪽 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양식 건축물로 경운궁 내에 위치한 정관헌(靜觀軒)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건물도 정관헌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沙婆眞, 薩巴丁], Sabatine, A.S.)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진에서는 이 건물을 “new royal library”라고 기록했다. 새롭게 만든 왕립도서관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른 자료에서도 수옥헌을 도서관이라고 한 경우가 발견된다. 이를 통해 수옥헌은 1898년(광무 2)경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용도는 도서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옥헌은 1901년 11월 16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화재 이후 중건하였는데 역시 서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중건 당시의 기록은 다른 서양식 건물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수옥헌이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한 후의 일이다. 경운궁의 대화재로 거처가 없어진 고종은 수옥헌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이 사이에 세계 정세가 급변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이 승리했다. 그 결과 일본은 1905년(광무 9) 11월 17일 수옥헌에서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종은 계속 수옥헌에 머무르고 있었고, 1912년 10월 29일에서야 비로소 함녕전(咸寧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수옥헌은 외국인 클럽(club)으로 이용되다가 1925년 3월 12일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내부가 전소되었다. 그러나 외관은 기존 수옥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이후 중건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