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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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작(封爵)

서지사항
항목명봉작(封爵)
용어구분전문주석
관련어공신(功臣), 내명부(內命婦), 봉군(封君), 외명부(外命婦), 의빈(儀賓), 제군(諸君), 종친(宗親)
분야정치
유형법제 정책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시대에 종친 제군과 내·외명부, 의빈, 공신 등에게 작위를 봉하던 제도.

[개설]
조선시대에 봉작은 종친(宗親) 제군(諸君)과 내·외명부(外命婦), 의빈, 공신 등에게 시행되었다. 담당 부서는 이조(吏曹) 소속 고훈사(考勳司)였다. 건국 직후에는 고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종친과 공신에게 공(公)·후(侯)·백(伯)을 봉하거나 후궁을 빈·궁주·옹주 등으로 호칭하는 등 조선이 지향하는 이념과 체제에 부합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차츰 관작제도가 정비되고 종법에 의한 일부일처제와 유교 윤리의 보급 및 적서 차별, 왕권의 확립 등의 바탕이 마련되면서 봉작제 또한 완비되어 나갔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부마와 공신 및 중궁의 부친을 군(君)으로 봉(封)하는 제도는 이전의 관행을 따라 시행되었다. 그렇다 보니 호칭의 혼동이나 질서 체계의 문란으로 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관작제와 종법제의 신분상의 수직적 질서 체계에 맞게 봉작제를 정비하는 것은 존비(尊卑)를 분별하고 명분을 정하는 일이었다.

[내용]
종실(宗室) 제군의 봉작제는 여러 차례의 개편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종친의 양첩(良妾) 소생은 적처 소생의 종친보다 품계를 한 등급 낮추어 주고, 천첩 소생은 한 등급 더 낮추어 주었다. 승습직(承襲職)은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 주었으며, 이들은 친진(親盡)이 되어야 문무관(文武官)의 자손의 예에 따라 벼슬을 할 수 있었다. 종친의 봉작 체계를 살펴보면, 왕의 적자는 대군(大君)으로 봉하며 무품(無品)이었다. 서자는 군(君)으로 봉하고, 역시 무품이었다. 정·종1품은 군인데, 종1품은 대군을 승습(承襲)할 적장자에게 처음 주는 벼슬이었다. 정2품의 군은 왕세자의 중자(衆子), 대군을 승습할 적장손, 왕자군(王子君)을 승습할 적장자에게 처음 주는 벼슬이었다. 종2품의 군은 왕세자의 중손(衆孫), 대군의 중자, 대군을 승습할 적장증손(嫡長曾孫), 왕자군을 승습할 적장손에게 처음 주는 벼슬이었다. 정3품 당상(堂上)은 도정(都正)이며, 정3품 당하(堂下)는 정(正)으로서 왕세자의 중증손(衆曾孫), 대군의 중손, 왕자군의 중자, 왕자군을 승습할 적장증손에게 처음 주는 벼슬이었다. 종3품 부정(副正)은 대군의 중증손, 왕자군의 중손에게 처음 주는 벼슬이었다. 정4품 수(守)는 왕자군의 중증손에게 처음 주는 벼슬이었다. 종4품은 부수(副守), 정5품은 영(令), 종5품은 부령(副令), 정6품은 감(監)이었다.

군(君)으로 봉하는 봉군(封君)은 왕비의 아버지 및 2품 이상의 종친·공신(功臣)·공신 승습(功臣承襲)에게 행하여졌다. 이들 및 3품 이하의 종친은 모두 읍호(邑號)를 쓰도록 하였다. 승습자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사망하면 봉군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공신이라고만 말하는 경우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은 이에 포함되지 아니하였다. 의빈(儀賓)도 같았다. 공신의 봉군은 정1품부터 종2품까지이며, 친공신과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府院君)이라 칭하도록 하였다. 의빈의 봉작은 공주에게 장가든 부마에게 처음 종1품의 위(尉)에 봉하며, 옹주에게 장가든 부마에게는 종2품의 위에 봉하였다. 군주의 부마에게는 정3품 당상의 부위(副尉), 현주의 부마에게는 종3품 첨위(僉尉)에 봉하였다. 정3품 당하도 첨위였다.

왕과 세자의 후궁에게도 작위가 내려졌는데, 후궁은 내명부에 속해 있었다. 왕의 후궁은 정1품부터 종4품까지이며, 작명은 빈(嬪)·귀인(貴人)·소의(昭儀)·숙의(淑儀)·소용(昭容)·숙용(淑容)·소원(昭媛)·숙원(淑媛)이었다. 세자궁에는 종2품부터 종5품까지 종품만이 있는데, 양제(良娣)·양원(良媛)·승휘(承徽)·소훈(昭訓)이었다.

외명부의 봉작은 남편의 관직을 따르도록 하였다. 서얼(庶孼)이거나 재가(再嫁)한 자는 봉작하지 않으며, 기왕에 봉작을 받은 자로서 개가(改嫁)한 자는 그 봉작을 추탈(追奪)하였다. 그리고 왕비의 어머니, 세자의 딸 및 종친으로서 2품 이상인 자의 처는 모두 읍호(邑號)를 쓰도록 하였다.

대전(大殿)의 유모(乳母)는 종1품 봉보부인(奉保夫人)이며, 왕비의 모(母)는 정1품 부부인(府夫人)으로 봉하여졌다. 왕녀(王女)는 적녀(嫡女)가 공주(公主), 서녀가 옹주(翁主)이며, 왕세자의 딸은 적녀가 정2품 군주(郡主), 서녀가 정3품 현주(縣主)였다.

종친의 처는 정1품 부부인(府夫人) 또는 대군(大君)의 아내는 군부인(郡夫人), 종1품 군부인), 정2품 현부인, 종2품 현부인, 정3품 당상관(堂上官) 신부인(愼夫人), 정3품 당하관(堂下官) 신인(愼人), 종3품 신인, 정·종4품 혜인(惠人), 정·종5품 온인(溫人), 정6품 순인(順人)이었다.

문무관(文武官)의 처는 3품을 제외하고 1품부터 9품까지는 정·종의 구분 없이 남편의 관직을 따라 봉작되었다. 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비롯하여, 2품 정부인(貞夫人), 정3품 당상 숙부인(淑夫人), 정3품 당하 숙인(淑人), 종3품 숙인(淑人), 4품 영인(令人), 5품 공인(恭人), 6품 의인(宜人), 7품 안인(安人), 8품 단인(端人), 9품 유인(孺人)까지였다.

[변천]
왕비는 고려 공양왕 3년에 왕의 정배(正配)를 비(妃)라 칭하고 세자의 정배를 빈(嬪)이라 칭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비’ 자 앞에는 미호(美號) 한 글자를 붙여 칭호로 삼던 것을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만 칭하고, 빈도 왕세자빈이라고만 칭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월 18일]. 왕비가 살아 있을 때 세자가 왕으로 즉위하면 대비로 칭해지고, 대를 거듭하면서 왕대비·대왕대비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왕녀는 궁주(宮主)라고 일컫던 것을 ‘공주’로 칭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4년 2월 16일].

왕비 외의 모든 후궁들은 내명부의 제도 안에 편입되었다. 빈·궁주·옹주 등으로 호칭되던 후궁은 1428년(세종 10)에 이르러 제정된 내관(內官)·궁관제(宮官制)에 편입됨으로써 정1품부터 정4품까지의 품계를 갖게 되었다. 곧, 정1품 빈(嬪)·귀인(貴人), 정2품 소의(昭儀)·숙의(淑儀), 정3품 소용(昭容)·숙용(淑容), 정4품 소원(昭媛)·숙원(淑媛)이었다[『세종실록』 10년 3월 8일]. 이것이 『경국대전』에서는 각 품마다 정·종으로 나뉘어져 8등으로 구분되었다. 1397년(태조 6)과 1405년(태종 5)에 마련된 여관(女官)제도는 후궁들이 여기에 편제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반 궁인들의 관등 체제였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외명부의 종실과 공신 및 문무관의 처는 1417년(태종 17)에 봉작법이 제정되었다. 그 이전부터 시행되던 것을 이때에 와서 법제화한 것이었다. 종실의 처는 정1품 한국대부인, 종1품 한국부인, 정·종2품 이자호(二字號) 택주(宅主), 정·종3품 신인(愼人), 정·종4품 혜인(惠人)이라 칭하였다. 공신의 처는 정1품 한국대부인, 종1품~종2품 이자호 택주라 칭하고, 문무관의 처는 전의 군부인(郡夫人)을 정숙부인(貞淑夫人), 현부인(縣夫人)을 정부인(貞夫人)으로 고쳤다[『태종실록』 17년 9월 12일]. 그 후 신하의 아내를 국(國)을 붙여 칭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종실 명부로서 정1품은 모부부인(某府夫人), 종1품은 모군부인(某郡夫人), 정·종2품은 모현부인으로 고쳤다. 공신의 명부도 정1품은 모군부인, 정·종2품은 모현부인으로 고쳤다. 그리고 2품 이상의 처에게 이조(吏曹)에서 직첩을 주던 것을, 이조에서 여러 사람의 논의에 서명해서 합하여 계문하면 왕이 임명하게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월 16일].

왕의 친형제와 왕자 및 종친의 봉작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고려에서는 공·후·백의 작위가 사용되다가 충렬왕 이후에는 대군·원군·군·원윤·정윤의 작위가 부여되었다. 조선은 건국 직후에 공·후·백 칭호와 군 칭호를 부여하는 봉작제를 병행하여 시행하였다. 태조는 즉위 직후에 안종원을 성산백(星山伯), 종친의 일원인 이성계의 서제 이화를 의안백(義安伯)으로 봉하면서, 정도전은 봉화군(奉化君)으로 제수하였다. 1392년(태조 1) 8월에는 첫째 아들인 방우를 진안군, 이복형제인 방번을 무안군, 사위인 이제를 흥안군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방의는 익안공(益安公), 태조의 손자인 복근은 봉녕후(奉寧侯)로 나타났다.

이러한 공·후·백의 작호는 1401년(태종 1)에 폐지되었으며, 봉작 규정은 1412년(태종 12)에 법제화되었다. 이때 적서의 구별이 이루어졌는데, 서자는 어머니를 빈잉(嬪媵)과 궁인(宮人)으로 구분하였다. 그리하여 적비의 아들은 정1품 대군(大君), 빈잉의 아들은 종1품 군(君), 궁인의 아들은 종3품 정윤(正尹)과 정4품 부정윤(副正尹)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왕의 친형제(親兄弟)는 대군으로 봉하고, 친형제의 적실(嫡室)의 장자(長子)는 군, 중자(衆子)는 종2품 원윤(元尹)으로 봉하도록 하였다. 친형제와 친자(親子)의 양첩(良妾)의 아들은 종2품 원윤과 정4품 부원윤(副元尹)으로 삼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2년 4월 25일].

종친의 봉작제는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개편되었다. 1414년(태종 14)에는 궁인의 소생을 상향 조정하여 원윤으로 봉하도록 하였다. 그 외의 특징은 적서와 양천을 철저히 구별하였다는 점이었다. 친형제의 적실의 장자와 중자에 대한 차별적인 대우는 적자로서의 지위를 강화하여 모두 군으로 봉하도록 하였다. 반면에, 첩의 자식은 양천을 구별하여, 친자와 친형제의 양첩 장자는 원윤, 중자는 부원윤, 천첩 장자는 정윤, 중자는 부정윤으로 봉하도록 하였다. 천첩 소생을 봉작 체계 내에 편입시키는 대신, 첩의 소생은 품계를 하향 조정하여 정윤은 정4품, 부정윤은 종4품으로 삼았다. 그 후 태종은 대군이나 원윤이나 모두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작위를 제한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여, 궁인 소생들의 작위를 원윤에서 군으로 높여 주었다. 궁인의 소생도 잠재적인 왕위 계승자임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 후 1443년(세종 25)에 또 종친의 봉작 규정이 개정되었다. 중궁의 아들은 대군을 봉하고 측실의 아들은 군을 봉하는데, 모두 정1품이고 자급이 없다고 한 것이었다[『세종실록』 25년 12월 9일]. 적서의 명분상의 구별을 없앨 수는 없으나 적서 간의 품계 차별을 철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경국대전』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어 왕자의 작위는 무품계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왕손으로서 승습자에 대한 보다 세분화된 봉작 규정이 마련되었다. 왕손으로서 승습 예정자는 종2품, 중손은 정4품이었다. 증손으로 승습 예정자는 정3품, 중증손은 종4품이었다. 현손으로 승습 예정자는 종3품, 중현손은 정5품이었다. 승습 예정자는 친부 사망 후 승습하는데, 왕손은 종1품, 증손은 정2품, 현손은 종2품이 되었다. 제손(諸孫)으로 양첩 소생은 1등을 내리고 천첩 소생은 또 1등을 내렸다. 2품 이상은 윤(尹), 3품은 정(正), 4품은 영(令), 5품은 감(監), 6품은 장(長)이라 일컬어 부곡(部曲)·향(鄕)·리(里)의 호(號)로 봉하고 장차 승습할 자는 2품에 이르면 군을 봉하도록 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1품의 경(卿)이 신설되고, 정·종을 구분하였다. 종3품 부정(副正), 종4품 부령(副令), 종5품 부감(副監)이 새로 제정된 것이었다. 『경국대전』은 기본적으로 1457년의 종친 직제를 계승하였으나, 1품의 경과 2품의 윤을 없애고 직명을 개정하여 수록하였다.

종친의 봉작은 1869년(고종 6)에 개정되었다. 이때에는 연령 제한을 신설하였는데, 대군과 왕자군은 7세에 봉작하고 적왕손과 왕손은 10세에 봉작한다고 하였다. 공주와 옹주는 7세, 군주와 현주는 10세로 정하였다[『고종실록』 6년 1월 24일]. 그리고 관제의 개정으로 정1품~종2품 군 승습(承襲) 이상은 칙임관(勅任官)으로 대우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6년 9월 18일].

봉군은 종친 외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공신과 부마(駙馬)에게도 행하여졌다. 이성제군부(異姓諸君府)가 설치되어 여기에 소속된 공신과 부마는 군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군으로 봉작된 사람이 모두 공신인 까닭에, 이성제군부를 공신제군부로 개칭하였다가 1418년(세종 즉위년)에 그 명칭을 환원하였다. 부마로서 군에 봉작된 사람은 공신이 아니므로 이름과 실지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1444년(세종 26)에 이성제군부를 부마부(駙馬府)로 개칭하고 봉군을 허용하지 않으며 산관(散官)을 주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6년 7월 1일]. 이것을 1450년(문종 즉위년)에 산관만 주면 칭호가 혼동되어 분별이 어렵다면서 모위(某尉)의 칭호를 추가하였다. 그 후 1466년(세조 12)의 관제 개편 때 부마부(駙馬府)가 의빈부(儀賓府)로 개칭되면서, 정·종1품 의빈, 정·종2품 승빈(承賓), 정3품 부빈(副賓), 정·종3품 첨빈(僉賓)을 두었다. 이것이 1484년(성종 15)에 이르러 2품 이상은 위(尉), 3품 당상은 부위, 당하부터 4품까지는 첨위로 일컫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5년 3월 21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기덕, 『고려시대 봉작제 연구』, 청년사, 1998.
■ 강제훈, 「조선 초기 종친직제의 정비와 운영」, 『한국사연구』 151, 2010.
■ 박경, 「조선 초기 왕실 가족 질서 정비의 특징」, 『여성과 역사』 1, 2004.
■ 지두환, 「조선 초기 종친봉작법의 변천」, 『한국사상과 문화』 4, 1999.
■ 최정환, 「고려시대 봉작제의 성립 과정과 정비」, 『한국중세사연구』 14, 2003.

■ [집필자] 임민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