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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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아문(內務衙門)

서지사항
항목명내무아문(內務衙門)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의정부(議政府)
하위어총무국(總務局), 판적국(版籍局), 주현국(州縣局), 위생국(衛生局), 지리국(地理局), 사사국(寺祠局), 회계국(會計局)
관련어내부(內部), 이조(吏曹), 내무부(內務部), 내무아문령(內務衙門令)
분야정치
유형집단 기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894년 6월 갑오개혁 때 전국의 지방 행정, 호구(戶口), 지적(地籍) 등 내무행정을 담당한 관서.

[개설]
1894년 6월 의정부와 8아문으로 관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내무아문은 8아문 가운데 하나로 이전의 이조(吏曹) 기능을 계승한 기관이다. 이때의 개편에서는 1880년대 내무부에 속한 여러 기구 중에서 일부 부서만 내무아문에 소속되었다. 내무아문에는 판적국(版籍局)주현국(州縣局)을 설치하여 전국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며 지방 행정을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새로 위생국(衛生局), 지리국(地理局), 사사국(寺祠局) 등을 설치하여 위생, 측량, 지리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1895년 4월 내각 관제의 시행에 따라 7부의 하나인 내부(內部)로 재편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894년 6월 갑오개혁 초기 개혁을 주도한 군국기무처는 조선 왕조 국가의 권력 구조를 변경하여 의정부와 궁내부를 분리하고 국가와 왕실의 권한을 구분하려고 하였다. 또 이전의 내무부와 육조(六曹), 기타 지나치게 많이 설치된 기구를 통폐합시키기로 하였다.

내무부는 1885년 5월 궁내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대궐 안에 설치되어 군국 사무와 궁내 사무를 겸하였고 각종 근대화 추진 기구가 여러 산하 기구로 설치되었다. 혜상공국(惠商公局)을 개칭한 상리국(商理局)을 비롯하여 전환국(典圜局), 기기국(機器局), 전운국(轉運局), 종목국(種牧局), 광무국(鑛務局), 연무공원(鍊武公院), 교환소(交換所) 등이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내무부는 당시 통리기무아문이 관장해야 할 업무의 상당수를 직접 맡게 되었고 의정부에 버금하는 강력한 기구로 활동하였다.

갑오개혁 때 내무부의 산하 기구들을 각 관계 기관별로 편입·해체시키면서 일부 부서만 내무아문으로 재편시켰다. 내무아문은 이전의 이조 기능을 담당하면서 새로 위생국, 지리국, 사사국 등이 설치되어 근대적인 위생, 측량, 지리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또한 행정 관리와 지방 관청 등을 통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사회 개혁의 지침을 지방에까지 내려보내는 등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주무 기관이었다.

[조직 및 역할]
내무아문은 대신 1명, 협판(協辦) 1명, 참의 5명, 주사 14명 등 21명으로 구성되었다. 내무아문에는 총무국(總務局), 판적국, 주현국, 위생국, 지리국, 사사국, 회계국 등 7개 부서를 두었다. 총무국은 미처 설치하지 못한 각국의 서무(庶務)를 맡아보는 부서였다. 판적국은 전국의 호수(戶數)와 인구를 조사하며 출생, 사망에 관한 모든 문서와 장부를 맡아보았다. 주현국은 각 지방의 모든 사무를 감독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위생국은 전염병 예방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며 의약(醫藥), 종두(種痘) 등에 관한 사무를 겸하여 통괄하였다. 지리국은 국내의 토지를 측량하고 지도를 만들며 도로, 교량, 나루 등의 사무 전체를 맡아보았다. 사사국은 나라 안의 높은 산과 큰 강, 사찰(寺刹), 신사(神祠)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지리국과 사사국은 위생국장이 참의를 겸임하였다. 회계국은 내무아문에서 출납하는 재정 문서를 맡아보았다. 각 부서별로 참의 1명과 주사 2~6명을 배치하였다.

1894년 7월 18일에는 종전 내무아문의 역할에 해당되었던 이조를 비롯하여 1880년대 근대화 기구를 총괄하였던 내무부, 제중원(濟衆院) 등을 소속 부서로 재편성하였다. 위생 행정 기구인 위생국을 설치하고 청일전쟁 이후 전국에 걸쳐 만연한 콜레라 등을 퇴치하는 데 앞장섰다.

1894년 7월 15일 초대 내무아문 대신과 협판으로 민영달(閔泳達)과 이준용(李埈鎔)을 임명하였다. 이후 7월 19일 대신으로 민영상(閔泳商)이, 7월 28일 협판으로 유길준(兪吉濬)이 임명되었다. 8월 25일에는 서상우(徐相雨)가 대신으로 거듭 교체되었다.

1895년 1월 5일에는 내무아문령을 내렸다. 1894년 12월 12일 고종은 조선이 자주·독립하는 기업(基業)이라고 종묘와 사직에 맹세하며 고하였고 신하와 백성들에게는 포고하는 윤음을 내렸다. 1월 5일의 내무아문령에서는 이것을 축하하며 자주·독립의 기치를 높이 들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 3월 10일에는 「내무아문훈시」라 하여 모두 88개 조항에 걸쳐 각 도에 앞으로 지켜야 할 개혁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또한 공·사노비의 혁파 등 사회 풍습의 전반적인 개혁을 선언하는 등 갑오개혁의 주요 지침을 하달하기도 하였다.

[변천]
1895년 3월 25일 의정부 8아문에서 내각 관제로 개편되어 3월 36일 칙령 제53호로 내부 관제가 공포되자 내무아문은 폐지되어 내부로 재편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속음청사(續陰晴史)』
■ 『관보(官報)』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1~40, 국사편찬위원회, 1986~1994.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1~4, 국회도서관, 1970~1972.

■ [집필자] 왕현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