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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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순행(南巡幸)

서지사항
항목명남순행(南巡幸)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순행(巡幸)
관련어거동(擧動), 궁내부(宮內府), 궁정열차(宮廷列車), 노부(鹵簿), 서순행(西巡幸), 순수(巡狩), 옥거(玉車),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친림(親臨), 친행(親行), 통감부(統監府), 행궁(行宮), 행재소(行在所), 행차(行次), 행행(行幸)
분야문화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1909년(융희 3) 1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간 순종이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대구, 부산, 마산 등 대한제국의 남쪽 지역을 순행한 일.

[개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천황의 순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1,000년 가까이 지속된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잊혀져간 천황의 존재를 적극 부각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에 비해 1909년 1월 순종의 남순행은 전혀 반대의 의미를 가졌다. 한국사의 경우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후 왕은 최고 권력자이며 최고 명령권자였다. 그러므로 순종의 존재를 새삼스레 국민들에게 부각시켜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의 남순행을 추진한 이유는 통감부와 순종이 얼마나 평화롭게 공존하는지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해서였다. 아울러 통감부의 지도 감독 하에 문명개화되어가는 순종황제의 모습을 선보임으로써 구래의 전통을 고집하며 일본의 정책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는 순종과 함께 순행하면서 순종은 가만히 있게 하고 대신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통감부의 정책을 선전하고 선동하였다.

[연원 및 변천]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의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에 의하면 1909년 순종의 남순행은 1909년 신년 하례식 자리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넌지시 제안을 하면서 시작되어 별실에서 즉시 이완용 총리와 합의해 그 자리에서 순종의 재가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순행의 목적은 국내 소요의 안정과 민심 파악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통감부와 순종이 얼마나 평화롭게 공존하는지를 대내외에 선전하기 위해 남순행을 제안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을 제외하면 국왕이 직접 한반도 변경 지역에 순행한 경우는 없었다. 하물며 순종이 순행을 거행한 1월은 겨울로서 일반인이 여행하기에도 벅찬 계절이었다. 따라서 황실의 전례도 없으며 계절적 상황이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순종의 순행이 거행된 것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속셈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절차 및 내용]
남순행은 1909년 1월 4일 순종의 조칙(詔勅)으로 공포되었다. 이 조칙에서 순종은 고종에게 양위받은 후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구활을 위해 노력했는데, 최근 국내 정세의 불안함과 백성들의 생활이 곤궁한 것이 염려되어 제왕의 안위를 지키기보다는 이런 혹한기를 무릅쓰고 직접 지방을 시찰하여 백성의 고통을 알아보려는 것이 순행의 목적이라고 천명하였다. 특히 순종은 영친왕의 태사(太師)이며 통감부의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순행에 배종하여 자신을 돕고 난국을 수습하려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순종의 남순행은 1909년 1월 7일부터 13일까지 6박 7일로 계획되었다. 일정은 경성의 남대문역을 기차로 출발하여 대구-부산-마산 등지를 거쳐 경성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순행 일정에 맞추어 수행원은 황실과 정부 요원의 두 부류로 정해졌다. 수행원은 궁내부 41명, 내각 42명, 통감부 13명으로 총 96명이고 이 중 한국인은 68명, 일본인은 28명이었다.

남순행 준비를 위한 인원과 물자의 동원은 전적으로 통감부에서 담당하고 지시하였다. 순행 기간 중에 이용된 궁정열차, 마차, 인력거, 숙소의 배정에 있어서도 일본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졌으며, 행사의 각종 의식 형태도 일본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아울러 순행지마다 개최된 환영회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 우호와 일본 제국주의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

순종이 방문하는 순행지마다 수많은 한국인이 모여 환영하였다. 황제가 기차를 타고 지방을 방문하는 것부터 전대미문의 일이었으며 일제가 의도적으로 거리를 정비하고 환영 분위기를 고무한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이처럼 순종의 남순행은 일제의 통감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환으로 거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궁극적으로 한국 사회를 자발적으로 일본의 통치 체제에 흡수, 동화하도록 유도하려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순종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해 각 지역 학교와 단체에서 태극기를 비롯한 각종 기념비적인 상징물을 설치하였던 것이 토대가 되어 이후로 민간에서 국가 행사를 준비하고 대응하는 방편이 되었다.

[참고문헌]
■ 김세은, 「고종초기(1863~1876) 국왕권의 회복과 왕실행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서영희,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 이민원, 「대한제국의 성립과정과 열강과의 관계」, 『한국사연구』 64, 1989.
■ 이왕무, 「대한제국기 純宗의 南巡幸 연구」, 『정신문화연구』 30-2, 2007.
■ 이장희, 「남순행일기」, 『국학자료』 9, 문화재관리국, 1973.

■ [집필자] 신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