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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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농윤음(勸農綸音)

서지사항
항목명권농윤음(勸農綸音)
용어구분전문주석
상위어윤음(綸音), 윤발(綸綍), 사륜(絲綸), 윤지(綸旨)
하위어관찰사(觀察使), 유수(留守)
관련어삼명일(三名日), 망궐례(望闕禮), 회례연(會禮宴), 정지급성절망궐 행례의(正至及聖節望闕行禮儀), 정지백관조하의(正至百官朝賀儀), 정지회의(正至會儀), 계주윤음(戒酒綸音), 척사윤음(斥邪綸音), 수성윤음(守城綸音)
분야왕실
유형의식 행사
자료문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정보화실


[정의]
조선 시대 국왕이 새해를 맞이하여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전국에 반포한 담화문.

[개설]
전통시대 한국의 왕과 중국의 황제가 관리나 백성들에게 당부하거나 타이르기 위해 내리던 명령을 윤음이라고 했다. 윤(綸)이란 실로 꼰 줄이라는 뜻이고 음(音)이란 소리란 뜻으로서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윤음은 ‘실로 꼰 줄과 같은 소리’라는 의미이다. 국왕이 관인이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윤음은 양으로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궁궐에서 반포된 윤음은 전국의 지방 관리들에 의해 백성들에게 다시 선포되었다. 윤음을 들은 백성들은 서로서로 그것에 대해 의논하고 평가했는데, 그 과정이 마치 실 뭉치에서 실을 뽑아내고 그 실을 꼬아 줄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해서 윤음이라고 했다. 윤음은 달리 윤발(綸綍)이라도 하였다. 발(綍)은 가는 실을 꼬아 만든 굵은 밧줄이므로 윤음이나 윤발은 결국 같은 의미가 된다.

전통시대 한국의 왕과 중국의 황제는 중요한 국정 현안에 대하여 윤음을 선포하곤 했다. 그 윤음은 국정 현안에 따라 다양하게 불렸다. 예컨대 조선 시대 국왕의 윤음에는 권농윤음을 비롯하여 계주윤음(戒酒綸音), 척사윤음(斥邪綸音), 수성윤음(守城綸音) 등이 있었는데 권농윤음은 권농 즉 농업의 장려에 관한 윤음이었고, 계주윤음은 계주 즉 술의 경계에 관한 윤음이었으며, 척사윤음은 척사 즉 사특한 것을 배척하는 것에 관한 윤음이고, 수성윤음은 수성 즉 도성의 수비에 관한 윤음이었다.

조선 사회는 농업을 기반으로 했다. 신년을 맞는 백성들의 최대 소망은 풍년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왕은 전국의 관리들에게 백성들의 소망을 상기시키고 나아가 그 같은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관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훈계하고자 정월 초하루에 권농윤음을 반포하였다.

[연원 및 변천]
조선 시대의 윤음은 원칙적으로 왕이 직접 짓는 어제였지만 승지나 각신(閣臣) 또는 유신(儒臣)이 왕명을 받고 대신 짓는 경우도 있었다. 권농윤음은 대한제국기 들어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 시대 왕실에는 삼명일(三名日)이 있었는데 정초, 동지 그리고 왕의 생일이 삼명일이었다. 정초와 동지는 한 해의 시작과 끝을 기념하는 명절이었다. 새해 소망을 기원하고 한해를 마무리 짓기 위해 정초와 동지를 명절로 했다. 반면 왕의 생일은 군주제도에서 주권자 생일을 기리기 위한 필요에서 명절이 되었다.

삼명일 중에서 정초에 가장 많은 행사가 있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의미가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정초에 국왕이 치르는 첫 번째 행사는 망궐례(望闕禮)였다. 새해를 맞아 중국 황제에게 인사를 드리는 의례가 망궐례였다. 궁궐 정전 옥좌에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올려놓고 국왕 이하 문무백관이 인사하는 의례가 망궐례였다. 두 번째 행사는 왕세자와 백관으로부터 새해인사를 받는 것이었다. 왕세자와 백관은 정전 옥좌에 앉은 국왕을 향해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는 철을 맞아 삼가 전하께서도 큰 복을 받으소서.’라는 인사말을 올렸다. 이에 대하여 국왕은 답례로 ‘신년을 맞는 경사를 경들과 더불어 즐기노라.’ 했다. 이어서 국왕은 내전으로 들어가 왕세자빈으로부터도 새해인사를 받았다. 새해인사가 끝나면 종친, 백관, 외국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잔치를 열었다. 이 회례연(會禮宴)에서는 술과 음악이 곁들여져 흥을 돋았다. 술처럼 또 음악처럼 군신상하가 서로 화합하고 즐기자는 의미의 잔치가 회례연이었다.

여기까지는 왕과 양반관료들만의 행사였다.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빠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례연 다음에는 국왕이 전국의 백성들에게 당부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 글은 농업을 장려하는 글이기에 권농윤음(勸農綸音)이라고 했다. 정초에 국왕이 전국의 백성들과 어울리는 행사는 권농윤음 반포가 유일했다. 그런 의미에서 왕의 신년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는 다름 아닌 권농윤음 반포였다.

권농윤음에는 올 한해 국왕이 농사지을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었다. 그 의지가 현실에 맞고 또 백성들의 마음에 맞을 때 백성들은 희망을 갖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왕은 심혈을 기울여 권농윤음을 짓거나 아니면 뛰어난 문장가에게 명하여 권농윤음을 짓게 하였다. 국왕이 반포한 권농윤음은 8도의 관찰사와 양도의 유수에게 전해졌고, 8도의 관찰사와 양도의 유수는 다시 관하의 수령들에게 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권농윤음이 백성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농업사회에서 권농윤음은 농민들의 농사력과 관련되어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전환점이 되었다.

[참고문헌]
■ 『銀臺條例』

■ [집필자] 신명호